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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겁도 없이 써 보는 도서 리뷰..

by 붕어만세
paint.jpg Edvard Munch | 책 읽는 안드레아스 1882-1883

표지는 에드바르트 뭉크가 스무 살 무렵에 그린 “책 읽는 안드레이아스”입니다. 역사학자인 큰 아버지 안드레이아스인지 동생 안드레이아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대로 보아 동생 안드레이아스 같습니다.


책 표지 월드컵 때, 저는 제목만 보고 카툰풍의 2안을 골랐었는데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니 1안이 더 묵직하고 좋네요. 표지가 잘 뽑혔습니다.



어떤 책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폈습니다. 첫 번째 문을 열자,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모비 딕의 한 장면이 나옵니다. 어릴 때 세상 멋있었던 에이해브 선장은 성질머리 더러운 꼰대가 되어있고, 낭만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스타벅은 냉정하고 침착한 으른이가 되어서 맞아 줍니다.


mobydick.jpg 저기..고래보다는 스타벅스가서 커피나 한잔 하면 안될까요?

..응? 그런데 이 책은 분명히 서툰 아빠와 인생의 첫 번째 파도를 맞은 아들의 이야기라고 했었는데?


겉보기에는 아빠와 아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껍질을 살짝 벗겨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과 다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더러는 자기 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더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해서, 대부분은 너한테만은 밀리지 않겠다는 허세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갈등의 현장을 영화나 소설, 희곡의 한 장면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저자의 담담한 나레이션을 통해 못난 기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면 하나하나 다 낯익은 이야기입니다. 그게 사실은 그동안 애써 잊고 있었던 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는 누가 볼세라 흠칫 놀라게 됩니다.


내가 뭐..여기서 평생 배구공이랑 농담 따먹기나 할 줄 알아? / 어.

쫄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슬쩍 얼굴을 비춰보면, 저 혼자 잘난 로베스피에르가 보이기도 하고, 할 말 못 할 말 다 지껄이고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못난 남편이 서 있기도 합니다. 홧김에 윌슨을 뚜까 날려 버리고는 연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척도 얼굴을 빼꼼히 내밀구요. 모두 부끄러워하며 서둘러 덮었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1 아빠와 아이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빠 다리에 착 붙어서 온몸으로 거실 바닥을 쓸고 다니던 딸래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카톡으로 쿠팡 샤핑 목록을 날리는 아이가 천연덕스레 앉아 있습니다.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딱히 예쁘지는 않은 걸 보면 분명 내 새끼가 맞긴 한데.. 저 알흠다운 말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속이 쓰립니다. 어디 가서 한 성깔하는 걸로 빠지지 않던 아빠는 혹여라 딸래미가 아빠의 못난 모습을 닮을까 봐 전전긍긍합니다만, 부글부글 끓는 울화통까지는 숨기지 못합니다.


나이만 먹었지 아직도 세상살이가 서툰 아빠는 도통 그 정신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딸래미와 하루가 멀다 하고 투닥이고 있습니다. 해결해야 한다는 건 둘 다 알고 있지만, 아직 방법을 찾지 못해 종종 멤을 도는 중입니다. 그래서 비슷한 길을 한 발 앞서갔던 아빠의 고민과 후회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2 아니, 사람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인가?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아빠와 아들 사이의 갈등은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이해받고 싶지만 그렇다고 나를 완전히 오픈하기는 싫은. 그 날카롭고 엣지있으면서도 적당히 둥글둥글 소프트한 그 지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 다른 경험을 쌓아온 이들은 자기들이 같은 분모를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아빠는 아들이 왜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놔서 계속 연락이 닿지 않는지 답답합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겨서 급하게 연락할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아빠 입장에서는 이 험한 세상에 애한테 한 시간만 연락이 닿지 않아도 별별 생각이 다 지나갑니다. 세상에 때르릉도 아니고 찌이잉으로 해달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인가..


급하게 연락할 큰일 자체를 겪어보지 않은 아이는 이것을 사생활의 영역으로 받아들입니다. 확인하면 알아서 연락할 텐데, 굳이 나의 시간을 방해하려는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보기엔 이건 핸드폰 벨소리까지 간섭하려는 아빠의 횡포입니다.


저는 동전 넣는 공중전화에서 집전화와 삐삐를 거쳐 시티폰이 핸드폰이 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친구네 집 식구들 한두 명 정도는 목소리를 구분하고, 동네 쌀집에 가면 그 집 할머니가 김여사 안부를 묻던 시대를 살았습니다.


아이는 왜 통화 아이콘이 수화기 모양인지부터가 의문입니다. 핸드폰은 얇고 납작한 네모거든요. 글자가 작으면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벌려 확대해 보는 아이는 아빠가 왜 내 친구들 목록을 궁금해하는지 기분이가 나쁘십니다..


김여사에게 귀에 피가 나게 들었던, 한쿡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민초들의 인생 역정. 나는 김여사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내게 듣는 이야기는 등장인물과 사건만 바뀐 같은 이야기입니다.


같은 공간에 았지만

아빠와 아이는 사는 세상이 다릅니다.



#3 어쩌면 인문 교양 안내서일지도..

책은 쉽게 쉽게 읽히지만 보기보다 많이 어렵습니다. 천천히 곱씹어봐야 하는 이야기들도 많구요. 물론 친절하게 모든 장면을 영사해 주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제대로 소화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저처럼 이과 - 공대 - 미대 테크를 타고 로동집약적 산업에 종사하는 기술직들에게는 연 단위의 분기별 계획이 필요합니다. 특히 저는 고전 벽돌책들을 수험생용 압축본으로 “공부”해서 더 그렇긴 합니다만, 저자 정도의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 많지는 않을듯 합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나이가 다르면 메세지가 다르게 읽힙니다. 20대 초반에 본 화양연화는 대체 야한 장면 언제 나오나 기다리다가 뭐 이딴 영화가 다 있냐며 분개하던 영화였습니다. 50 즈음에 다시 본 화양영화는 세상에 이런 영화가 다 있네 싶어 가슴이 먹먹합니다. 배구공 월슨과 투닥이던 척을 보며 피식 웃던 청년도 귓가에 흰머리가 올라오더니만 김여사 사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꼰대의 표상같은 함장인데, 현실에서는 저 정도 능력있는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레퍼런스의 폭이 상당히 넓어서..가끔 기억이 꼬이기도 합니다. 왜 그..크림슨 타이드라고 잠수함 영화 있잖아요. 어뢰 날아올 때 달라스함이 끼어들어서 인터셉트하는 영화. 20년이 지나도 그 장면은 기억에 남아있..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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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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