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얼마전 대구역 번개 시장 포장 마차가 꿈에 나왔다. 할아버지는 잠깐의 귀향을 앞두고 몇백원의 소주 잔술을 마시곤 하셨다. 할아버지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아 꿈속에서 당황했고 보속이라도 하듯이 번개시장을 가보고 싶어 졌다. 나의 대구는 많이 달라졌다. 남보다 못하게 된 친척들이 있고 집이라고 부르던 곳은 재산권은 물론 추억까지도 타인들이 차지했다. 일부러 마음속에서 그렇게 밀어 냈는지도 모르겠다.
죽으란 법은 없는지 자칭 문디 반상회를 코로나를 뚫고 개최 하게 되었다. 대학교 지인 모임인데 만나 봐야 죽자고 술만 마시고 게임방이나 전전하다 다시 죽자고 술을 먹는 아주 맘에 드는 모임을 핑계 삼아 외박 허가를 받았다. 늦은 오후가 약속이지만 아침 일찍 나섰다. 번개시장부터 가보고 싶었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는 대구행 직행 버스는 생각보다 쾌적하지 않았다. 엉덩이가 아팠고 빌린 책은 더럽게도 재미가 없어 읽히지 않고 깊은 잠으로 이끌만큼 진지하지도 못해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겨우 구미였다.
그래서 아직도 1908년대인 구미 시외버스터미널을 찍고 동대구 터미널에 도착했다. 생겼다고 말만 듣던 신세계 백화점은 여지없이 내 추억들 위에 양반자리를 틀고 앉았다. 동대구역을 빙글 돌아 내려가던 그 긴 실외 에스컬레이터도 주말부부 할 무렵 그대가 나를 기다려 주던 횡단 보도도 사라졌다. 서울이나 여기나 다를게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 내가 알던 옛적 대구를 찾아 대구역으로 갔다. 지하철을 타고 대구역에서 내려 롯데 백화점을 지나 번개시장으로 가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다. 그 잔술을 팔던 포장마차는 지하주차장에서 가는 길이 되어 있었고 대문짝만한 간판이 나 번개시장이오!! 하고 있었다.
재례시장 개선 사업을 해서 원래 보다 훨씬 멀쩡하게 보인다. 오전 5시부터 8시까지 장이 섰었는데 지금은 상설 시장이 된듯하다. 이제 포장마차는 찾아 볼수 없다.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그 흐린 기억 처럼 몇몇은 철거를 앞두고 겨우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었지만 기억도 세월에 온전하지 않은지 작아지고 낡았졌고 어떤 것들은 더러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해져 있었다. 그러면서 뜻하지 않게 내 몸뚱이를 뒤적거려야 했다. 꾸깃해진 마음들로 기억을 펼쳐 보면 부끄러움 가득한 나를 발견할까 두려웠다.
그리고 자연스레 발걸음은 대구역에서부터 동성로를 지나 집으로 가던 버스 타던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대기업 유통에서도 살아 남는 유일한 향토 백화점이라면 대구백화점과 이번달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하고 동아 백화점은 이미 지난해에 영업 종료 현수막을 채 떼지도 못하고 달고 있었다. 난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그대와 함께 가던 ‘나이스 데이’의 존재가 궁금했다. 대구역 가지전 2층에 있던 그 커피숍은 첼로와 다방의 중간 어디쯤의 분위기가 있었고 그대는 코코아를 시켜 먹고 했다. 거기서 더 올라가면 동성로의 지나 아카데미며 한일극장이며 만경관이며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반월당 사거리에 있는 당시로서는 꽤나 비싼 레스토랑에서 돈까스가 볶음밥을 먹곤 했다.
중앙 지하상가에서 넉넉하지 않은 지갑이 미워지는 이쁜 액세서리들을 보고 다음에 용돈을 받거나 가끔 하루짜리 용역일을 다녀오면 사주겠노라 다짐을 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왠만한 아이 만한 코카콜라 곰인형을 사서 그대에게 으쓱 거리며 주었다.
대학교를 다닐때 쯤은 동성로 떡볶이를 그렇게도 열심히 먹었고 버스를 타고 중앙통에 내려 종로를 걸어 만경관으로 영화를 보고 시간이 남을땐 감영공원에서 하릴 없이 거닐곤 했다.
엄앵란이 가지고 있었다던 무궁화 백화점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공부를 좀 해보겠다고 열심히 다니던 중앙도서관도 무척이나 변해 있었다. 담이 없어졌고 전경들이 데모 진압 훈련을 하던 경찰서도 어디로 옮긴 것 같았다. 그 앞에 있던 분식집은 문에 창문마다 뻘겋게 철거 예정이라고 뒤집어 쓰고 있었고 강산면옥은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극장이 있던 자리의 기억은 명확해서 보면 예술 극장이나 다른 어떤 공공 사업에서 예산을 받은 극장이 되어 있었지만 하물며 대구에서 그런데 먹힐리가.
중앙 도서관은 참 추억이 많은 곳이다. 국민학교때 작은누나와 함께 온 것을 처음으로 열람실에 있던 비싸서 사볼수 없었던 월간지를 좋아했다. 만화책 같은것도 더러 있었고 뉴턴, 과학동아, 월간 PC 같은 것을 볼수 있었다.
골목 골목 마다 어딘가를 복사 복사 해서 붙여 놓은 듯했다. 그나마 동아백화점 뒷 골목은 여전해서 납작 만두며 떡볶이며, 그리고 열심히도 불러대는 아줌마 아저씨며.
저 골목 어디쯤에서 애비와 처음으로 가오리 찜을 먹었다.
마신 농약이 그다지 치명적이지 못했고 한달 즈음을 집 앞에 있던 대학병원 신세를 졌고 시골집 내려가던길에 애비가 저 골목 어디쯤으로 데려가 소주를 시켜놓고 물었었다. 왜 그랬냐고. 그때 나는 대답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부자는 아직도 대화라는 것을 할 줄 모른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관람차가 보이는 통신골목 커피숍에서 이글을 조금씩 썼다.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대구학원이 없어진걸 보았고 유신학원도 병원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내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나도 조금씩 저렇게 무너 뜨리고 용도를 바꾸고 필요보다는 의지에 의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
어떤 골목에서 이질감이 또 어떤 골목에서 추억이 몰려 들고 생각이 복잡해 졌다.
글을 쓰면 나의 무언가가 가벼워 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유년 어디쯤에 울어야 할지 마른 침 삼키며 나를
또 천천히 기억해 봤다.
다음에 갈때까지 안녕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