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최초의 글쓰기는 그림 일기였다. 졸라맨 수준의 그림을 잘 참아준 담임이 백일장에 보내준 덕에 덜컥 입상이 되었다. 그러고 몇 번 더 상을 받게 되자 잘난 척 하는 수단이 되었다. 가난과 기침처럼 실력도 금방 들키기 마련이다. 운문과 산문 선생들이 서로 데려 가려는 영광도 잠시 ‘쟤 글은 너무 잘난척 해’ 라는 선생들의 뒷담을 아이 컨택 하면서 들었다. 그 이후로 글을 보여 준다는 게 부끄러워 졌다. 그나마 책도 못 읽던 일진들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으로 연애편지를 대필 해주면서 위안을 삼았다. 조금의 세월의 지나 국문학과 진학을 포기 당한 게 나름 다행이라 여기게 된 건 우연찮게 상업적인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된 후였다.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드라마에서 보는 것 처럼 환상적이지 않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맘속으로 들어왔다’라는 카피는 하나씩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봉준호 감독도 봉만대 감독도 같은 감독이다. 심지어 광고회사 다닌다고 하면 현수막 만들어 달라고 부탁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직업을 갖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호랑이 전자담배 피던 시절의 잘 각색된 추억만을 가지고 면접을 잘 본 결과였다. 처음에는 회사에서도 업계 선배들한테도 인정을 좀 받았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난 기침을 해댔고 A.E(기획)로 전직을 권유 받았다.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신 광고주님 입안에 껌 같이 굴어주는 자세 덕분에 가능하게 된 것 이여서 나의 구전문학만 일취월장했다. 열심히도 일했었다. 덕분에 서울로 회사도 옮기고 제법 괜찮은 대우도 받았지만 일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강철부대도 광고 PT 하나 못한다가 학계 정설이다. 광고쟁이들 전부 ‘내가 지금처럼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다.’며 읊조렸다. 광고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거였다.
그런 세월을 보내면서 힘들 때마다 일탈을 꿈꾸는 것이 작가라는 환상 이였다. 잘 여문 자만심은 그 옛날의 부끄러움을 잘 덮어 놓고 당장이라도 유명작가 되어 집필실에서 시가에 싱글몰트를 마셔 대며 베스트셀러를 쓸 것 같았다. 현실은 정직했다. 기형도가 좋아서 시를 쓰고 다시 읽어보면 손가락이 닭발인가 싶었고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같은 소설을 쓰고 싶은데 제제는 서울 고등학교 일진을 재패한 뒤 하바드 법대로 입학 했다. 스트레스에서 많이 벗어난 요즘 게임하다 남는 시간에 뭘 좀 끄적여 보니 에세이가 수월했다. 그래도 고질 적인 문제인 ‘글을 쓰는 게으름’ 고쳐지지 않았다. 동기부여를 위해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은가?’에 대해 정말 오래도록 고민했다. ‘자기 팔자를 팔아 사는 것이 글쟁이’라며 그 고됨을 신체적으로 전달하며 외치던 부친이 기억이 났다. 난 말할 수 없었던 나에 대해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고 쓰기만 하면 면죄부 같은 걸 받은 줄 알았던 거다. 안 써지는 게 아니라 솔직하지 못한 거였다.
읽은 척한 책들과 좋아하는 척 했던 음악들과 들었던 괜찮은 경험들로 옷을 지어 입고 살았을 뿐 정작 솔직함 같은 것은 주머니에 찔러 놓은 손에 꼭 쥐고 살았던 거다. 뭔가 대단하고 큰 이야기보다는 제법 솔직하게 담담하게 쓰고 싶다.
*'반짝이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나인채로 그대로'는 릴케 시인의 젊은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