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조치원에게
마지막 이사이길 바라며 그대는 모든 걸 정리하고 싶어 했다. 신혼 때부터 손 때 뭍은 가구며 식기며 옷이며 모든 걸 구분해서 내어 놓았다. 이사용 쓰레기 봉투의 입을 벌릴 때 마다 왠지 모를 허기가 졌다. 언젠가 볼 거라며 가지고 다니던 책들도 열십자 매듭으로 재갈을 물렸다. 그중에서 기형도 시집을 빼들고 ‘조치원’을 다시 읽으면서 그 사내와 같은 다짐 조차 없이 다시 올 일이 없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사 하던 날은 비가 부슬 부슬 왔고 ‘니가 용띠라서 크게 움직이면 비가 온다’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저번 이사와는 달리 여유가 많아진 나는 원주에 이사할 집과 회사와 부동산 계약과 대출까지 알아 보고 그대에게 보고를 하며 연신 흐뭇했다. 신혼집 외에는 그 숱한 이사를 내 밥벌이의 분주함을 핑계로 그대가 책임지다시피 했다. 다 피해갔는데 어쩌다 날 못 피해서 결혼한 그대가 이사 다니는 내내 안쓰러웠는데 죄책감을 조금 덜게 되었다.
비가 오는데도 우리는 즐거웠다. 더 이상의 주말 부부도 그 사이 소소하던 다툼도 없어질 터였다. 역마살이 있다던 조금 오래된 일이 떠올랐다.
20대, 내 인생이 이따구 인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일찍 접는 것도 방법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깊이 생각했다. 성당엘 가야 용돈을 주던 모친발 신앙생활도 유물론자를 자처하면 끝내 버렸으니 천국 지옥 따질 것도 없었다. 그래도 꽁지 돈 받아 섯다 하는 심정으로 주역을 꾸역꾸역 읽었다. 결국 읽은 수고도 무색하게 복채 5만원으로 본 내 인생은 역마살이 역대급 이라는 것만 남겼다. 이걸 좋게 해석했다. 어릴적 부터 잦은 이사 탓인지 성격 탓인지 친구가 유독 없어서 혼자 놀다 보니 여행이 가장 좋고 편안했다. 그 흔한 mt 도 가지 않던 나는 혼자 다니는 여행을 남들이 알면 놀림거리가 될까봐 불안했었지만 점집을 다녀온 후로 위안을 삼게 되었다.
더구나 결혼 후 둘이 되고 나서 주니어가 오기 전 8년 동안 열심히 놀러 다녔다. 역마살 때문에 어쩔수 없었다. 서울로 직장을 옮기고 안양으로 이사를 할 때도 괜찮았지만 전세 보증금 4천만원 때문에 더 작은 집으로 옮기면서 역마살이 순 작용을 시작했다. 일은 더럽게 바빴고 힘들었고 부인은 주니어를 기다리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다시 대구로 내려 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 갔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했다. 관성을 가지기 시작한 삶은 스턴트맨 기차에서 뛰어 내리듯 되진 않는다. 가방엔 불안과 함께 속옷 따위를 지고 3~4일에 한번 씩 집에 들어 왔고 그나마도 밥을 먹고 나면 죽은 듯이 잠을 자는 것이 전부 였다. 서로의 불만이 조금씩 쌓여 갔고 하지도 않던 말다툼이 생길 무렵 드디어 우주에서 주니어가 도착했다. 산부인과를 다녀오니 눈이 팔랑 팔랑 내려와서 태명을 ‘설이’라고 하기로 했다. 그러고 지금 회사로 이직을 했고 주말 부부를 1년 남짓 하다가 서울 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출퇴근이 편한 곳에 구한 20년 쯤 된 아파트는 도배와 싱크대만 새로 하니 새집 같았다. 그리고 살면서 가장 넓은 아파트여서 내방도 하나 생겼다. 5일장에 가서 장을 보고 원주천에 나가서 놀고 주변에 있는 캠핑장과 산과 관광지를 다니느라 주말엔 집이 집을 지켰다. 수입은 많이 줄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노후니 학자금이니 저축에 대해 스트레스를 조금 받았다. 그것도 잠시 마당 있는 집에 살아보자며 은행 삼촌에게 돈을 빌려 여주로 이사를 하고 또 얼마 전에 다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여전히 우리는 지치지도 않고 잘 돌아다니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살면서 후회 되지 않은 날이 없겠지만 후회 하지 않을 날을 사는 심정으로. 그래도 아직도 덜 식은 회한 같은 것들은 지나온 집들마다 하나씩 내려둔다. 이제는 역마살도 지쳐 이사할 생각이 없지 않을까 하면서.
* 제목은 팻 메스니의 곡 ‘off-r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