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애비는 1951년 2월 22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2023년 7월 18일에 돌아갔다.
향년 74세, 병석에 누운지 만 10년이다.
경북 상주군 이화리에서 일가를 이룬 할아버지는 넓은 땅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자식은 없었다.
큰 할아버지와 동문 수학 하시던 친구분의 막내 동생과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되었다.
첫딸을 낳고 두번째로 애비가 태어났다.
'안동네'라고 불리는 동네에 제일 큰 기와집으로 이사를 했다. 아마 그때 부터 부자집 아들 소리를 들었을 거다. 어릴적 부터 총명해서 김천으로 유학을 갔고 전교 1등은 아니어도 몇등까지는 항상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북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대구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할아버지는 대구에 집을 사서 자식들의 유학과 재테크를 동시에 해결 하셨다. 훗날 이집은 내가 서른이 넘도록 지내던 집이 되었다.
대학 입시와 동시에 결혼한 애비는 큰누나와 딱 20살 차이가 난다. 엄마는 한살 많고 동네에서 이쁘다고 소문난 국민학교 동창이였다.
생활 자체는 검소한 할아버지 밑에서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나락 가마니를 몰래 팔아 라디오를 사던 애비는 대학 졸업 후 내가 다닌 중학교에서 2년동안 수학 선생을 하였고 월급은 다 술을 마셨다.
몇년의 직장 생활을 거쳐 대구집에서 전자제품 대리점을 크게 시작하였지만 경리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면서 뻔한 클리셰의 테크를 타기 시작한다.
다시 시골집으로 돌아온 애비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만 술주사에 못 이긴 조부모님은 대구로 나가셨고
아주 오랜기간 동안 어둑시니가 깔린 시간에 골목길에선 '희망가'를 부르며 집에 들어오는 애비는 공포 그 자체 였다. 맞는 날이 많았고 밤새 무릎 꿇고 앉아 주사를 들어야 했다.
어린이날 기차를 타고 달성공원을 간 일, 대구 집에 다녀오면 부르마블을 사다 준 것, 컴퓨터를 사주고, 해마다 고장 나는 비싼 카세트를 사주었다. 혹은 군대 간 아들에게 한문으로 읽기 어려운 편지를 보낸 일.
막내 동생과 무을못에 낚시를 갔던 일. 대구 교동 골목에서 가오리찜을 먹었던 일.
그러는 동안 단 한번도 손을 잡거나 안아 주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런 세대였고 그런 세월이였으니까.
막내 동생이 졸업을 하고 4남매가 이래 저래 알아서 자리를 잡아 가던 동안 애비는 너무 많은 담배와 술로 인해 피폐해져 갔다. 술 마실 체력이 떨어질 즈음 할머니를 협박해서 받은 돈으로 큰 기와집 위에 새로 지은 집 거실에 라꾸라꾸 침대를 놓고 거기서 움직이지 않았다. 15년 동안
집에 가서 자는 날이면 밤새도록 폐병 환자 같은 기침 소리를 들었고 조카들도 잠들기 힘들어했다.
병원은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훗날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해서 암이 발견 되기 전까지 갖은 욕과 짜증을 내며 약속?을 지켰다.
그렇게 긴 자살이 시작되었다. 나는 5년동안 한달에 두번 집-본가-병원-본가-집의 동선을 소화해 냈다. '긴병에 효자 없다' 라는 말을 되뇌이며 애비보다는 엄마를 위해서 였다.
1/4만 남은 폐 덕분에 치료는 요원했지만 원체 강골이여서 방사능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더 이상 진행은 되지 않는 다는 의사 소견이 나왔을때 엄마는 낯빛이 어두웠다.
어떤 날은 애비가 거의 숨을 쉬지 않는다고 연락이 와서 119를 부른 후에 본가를 갔다. 엄마는 그냥 조용히 숨을 안쉬면 어떨까 해서 부러 연락을 늦게 했다고. 화가 나기 보다는 엄마가 안쓰러웠다. 평생 애비의 부속물로 살았다. 숙취로 잠든 애비는 예민해서 몇시간이고 파리를 쫓아야 짜증을 내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고 매 끼니때 마다 험한 말로 찬 투정을 했다.
'난 절때로 병원엔 안가'
라던 애비는 치과 치료도 무서워해서 '야매'로 이빨을 치료해서 평생 고생했다.
'내 자존심만 안건드리면 돼'
는 자신의 행적에 대한 품평을 하지 말라던 뜻이였다. 별말 없고 항상 눈물을 먼저 흘리던 순둥이였던 나는 애비의 성격을 제일 많이 닮아 있다. 지랄총량의 법칙이였던가. 대학무렵에 말 싸움을 하다 재떨이도 맞고 발차기도 맞기 일쑤였다. 다 옛날 일들을 말하다가 생긴 일이다.
'나 죽으면 우하못에 뿌려서 가끔 낚시나 하러와'
오십 즈음부터 혹은 제사 지낼때 마다 하던 말이다. 심지어 나는 청개구리 우화처럼 그럴 생각도 있었지만 다들 만류했다.
엄마는 딱 한번 울었다. '잘 가. 고생했어'라고 했다. 임종을 지킨 나는 돌아 가실 때 까지만 울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왔었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 집안 어른들은 4남매 사이가 좋은 것을 항상 부러워 했었고 부잣집 아들이 돌아갔지만 나눌 유산 같은 건 없었다.
할아버지와 같이 놀았던 조카들만 간혹 보고 싶어도 울었지만 우리들은 그런 일은 없었고 엄마의 희생이 아니였으면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없었던 가혹함들을 추억처럼 나누었다.
그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인간적인 궁금증은 남는다. 좋은 집안, 좋은 머리, 좋은 학벌, 순종족이고도 착한 부인과 별 사고 없이 크는 자식들을 두고 왜 그랬는지.
나도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안녕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