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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Mar 19. 2017

[책잡히는 독감]아흔 살의 앙팡 테리블, 제임스 왓슨

제임스 왓슨의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25살에 DNA 이중나선 구조를 처음으로 발견한 왓슨은 

천재 생물학자라는 칭송 외에  그만의 이상한 인기(?)가 따라다녔다. 

동료 연구들의 도움으로 소위 말해 '운빨로' 노벨상으로 탔다?라는 평판도 있었고,

하버드 대학교수 시절, 다른 학자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고, 

노벨상을 경매로 내놓은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우연한 기회에 제임스 왓슨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젊은 나이에 노벨상이란 영예로운 삶의 축배를 터트린 그의 인생이 어땠을지, 

그의 자서전을 뒤적였다.

'Avoid boring people'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 이레 



노벨상 시상식에서. 여동생, 아버지와 함께. 


아흔 살의 앙팡 테리블*제임스 왓슨(1928~    



1962년 제임스 왓슨은 동료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 또한 왓슨과 같은 대학 연구소 동료 존 켄드루와 막스 페루츠였다. 이 해 노벨상 시상식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사였을 뿐만 아니라, 왓슨의 인생에서도 최고의 순간, 축제 그 자체였을 것이다. 


 스톡홀름 시청에선 노벨상 수상자를 위한 성대한 연회가 열렸는데, 이 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스타인백은 연단에 올라 수상소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왓슨은 차분히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다음 차례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왓슨은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인생의 단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열한 살부터 아버지와 함께 새 관찰을 하며 쏘다녔던 나날들. 휘파람새, 비레오새, 딱 새들의 차이를 기록하며 새 전문가로의 꿈을 키웠던 시절들. 

어느 날 열세 살의 소년은 우연히 선생님의 책상에서 자신의 IQ 검사 결과를 훔쳐본다. 언어능력시험 결과는 반에서 일등이었지만, IQ는 120점을 넘지 못해 엄청 풀이 죽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였을까, 당시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 <퀴즈 키즈>에 출연해 지식을 뽐냈고, 그때 받은 상금으로 7×50 바슈롬 쌍안경을 구입하기도 했다. 


 꿈과 오기 그리고 별난 기질을 가진 소년에게 행운의 기회가 다가온다. 당시 시카고 대학 총장 로버트 허친스가 새 입학제도를 마련해 고등학교 2학년에게 입학기회를 준 것이다. 15살의 왓슨은 대학생이 되었다. 

(왓슨의 부모님은 시카고 대학 입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왓슨의 아버지는 허친스 총장과 대학 동창이라 친분이 있었고, 어머니도 당시 민주당 활동으로 허친스 교장과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왓슨은 그의 자서전에서 시카고 대학 입학은 부모님의 인맥에 덕분인 거 같다고 썼다. 물론, 왓슨이 똑똑해서 뽑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허친스 교장의 교육철학은 ‘대학은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고, 왓슨은 공부를 하며 ‘무엇을 외우기보다 왜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왓슨의 인생을 바꾸어놓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1951년 나폴리에서 열린 소규모 학술대회에서였다. 이때 모리스 윌킨스가 공개한 ‘DNA X선 회절 사진’은 왓슨에게 DNA 연구가 자신의 길임을 비춰주었다. 그 후 케임브리지 연구소에서 프랜시스 크릭을 만났고, 둘은 본격적으로 DNA 구조를 연구해 마침내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게 된 것이다. 


 마치 성당의 종탑 꼭대기로 가는 나선형 계단 같은 인간의 DNA 구조는 참으로 아름다웠고, 이것은 한 장 반짜리 짧은 논문으로 완성되었다. 1953년, 4월 25일 네이처지에 실린 이들의 논문은 DNA 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9년 뒤 이들을 노벨상 수상자로 만들었다.


 혹시 왓슨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노벨상을 타고, 그 뒷이야기를 책으로 묶어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될 줄을 말이다. 


1967년 왓슨은 DNA 이중나선 발견의 과정을 출판하겠다고 했는데, 공동 수상자 크릭과 윌킨스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유명 변호사를 내세워 소송을 걸기도 했다. 하버드 대학 출판부도 분란이 생기자 발을 뺐으나 고집쟁이 왓슨은 1968년 <애틀랜틱 먼슬리> 1월, 2월호에 실었고, 그 후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이중 나선>이다. 많은 소년, 소녀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꾸게 하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과학자들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명저, 왓슨의 글 솜씨 또한 명품이다.  


레드클리프 미녀,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이한 왓슨 


 

 또한 왓슨은 알았을까? 


레드클리프 칼리지의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클린턴 행정부 직속 과학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뉴욕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이끌게 될 줄을. 

 반면, 끊임없이 다른 생물학자들과 갈등을 겪고, 인간유전체계획(인간게놈프로젝트)를 이끌다 국립보건연구소 소장과 마찰을 빚어 도중하차하고, 결국 인간지능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이 문제가 되어 은퇴하게 될 줄을 말이다. 


 영화 몇 편은 나올 거 같은 그의 인생, 골목골목에서 인생 최고의 순간, 그 축제의 현장은 자주 기억되었을 것이다. 


존 스타인벡은 수상소감을 하고 있고, 그다음은 내 차례다. 스타인벡은 인류가 신의 특권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요한복음서의 말을 살짝 바꿔 읊기도 했다.** 

 

그렇다면, 왓슨의 수상 연설***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인간의 유전자는 생명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라고, DNA 염기서열에 의해 진화를 볼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다윈이 ‘생명 나무’로 큰 그림을 보여줬듯이 왓슨은 이중나선으로 내부 지도를 보여주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생물학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고 인간 본성 자체를 탐구해나가야 한다고 당부한다. 


그의 영혼은 늙지 않고 날이 선 채 인류를 위시(危視)하고 있다.    


왓슨의 서재 





* 장 콕도의 소설 <LES ENFANTS TERRIBLES>에서 나온 말로,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관철시키는 ‘무서운 아이’

** 제임스 왓슨의 자서전 ‘지루한 사람과 어울지 마라’ - 이레 출판사 270P 중에서


*** 수상 연설 전문

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medicine/laureates/1962/watson-speech.html


he Nobel Prize in Physiology or Medicine 1962
Francis Crick, James Watson, Maurice Wilkins


Banquet Speech

James Watson's speech at the Nobel Banquet in Stockholm, December 10, 1962

Your Majesties, Your Royal Highnesses, Your Excellencies, Ladies and Gentlemen.

Francis Crick and Maurice Wilkins have asked me to reply for all three of us. But as it is difficult to convey the personal feeling of others, I must speak for myself. This evening is certainly the second most wonderful moment in my life. The first was our discovery of the structure of DNA. At that time we knew that a new world had been opened and that an old world which seemed rather mystical was gone. Our discovery was done using the methods of physics and chemistry to understand biology. I am a biologist while my friends Maurice and Francis are physicists. I am very much the junior one and my contribution to this work could have only happened with the help of Maurice and Francis. At that time some biologists were not very sympathetic with us because we wanted to solve a biological truth by physical means. But fortunately some physicists thought that through using the techniques of physics and chemistry a real contribution to biology could be made. The wisdom of these men in encouraging us was tremendously important in our success. Professor Bragg, our director at the Cavendish and Professor Niels Bohr often expressed their belief that physics would be a help in biology. The fact that these great men believed in this approach made it much easier for us to go forward. The last thing I would like to say is that good science as a way of life is sometimes difficult. It often is hard to have confidence that you really know where the future lies. We must thus believe strongly in our ideas, often to point where they may seem tiresome and bothersome and even arrogant to our colleagues. I knew many people, at least when I was young, who thought I was quite unbearable. Some also thought Maurice was very strange, and others, including myself, thought that Francis was at times difficult. Fortunately we were working among wise and tolerant people who understood the spirit of scientific discovery and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its generation. I feel that it is very important, especially for us so singularly honored, to remember that science does not stand by itself, but is the creation of very human people. We must continue to work in the humane spirit in which we were fortunate to grow up. If so, we shall help insure that our science continues and that our civilization will prevail. Thank you very much for this very deep honor.


From Les Prix Nobel en 1962, Editor Göran Liljestrand, [Nobel Foundation], Stockholm,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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