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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Feb 16. 2018

<블랙 팬서>에서 <라이온 킹> 읽기

feat. 켄드릭 라마

 영화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켄드릭 라마'의 사운드 트랙과 부산에서 펼쳐지는 영화 블랙 팬서의 스릴 넘치는 차량 추격 장면은 <베이비 드라이버> 이후 가장 세련된 시청각 감동을 선사한다.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제대로 된 '블랙 히어로'를 갈망해왔던 수많은 영화팬들 그리고 마블과 켄드릭 라마의 팬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특히 켄드릭 라마의 사운드 트랙을 영화관에서 화려한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블랙 팬서>는 가치가 크다.


<블랙 팬서> 사운드 트랙에 참여한 켄드릭 라마와 SZA. 영화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을 남겼다.


  또한 영화계에서 가장 약자층에 속했던 '흑인 여성'들을 폭력 피해자나 답답한 걸림돌이 아닌 용맹하고 현명한 캐릭터로 그려냈다는 점 역시 의미가 컸다. 실제 물리적으로 더욱 강력했던 '블랙 팬서' 보다 그 주변의 여성 조력자 '블랙 히로인'들이 더욱 부각됐던 이유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최근 영화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여성 인권문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블랙 팬서는 스토리 전개면에서 여러모로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유는 스토리 전개가 예측 가능하고 갈등 구조가 신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서스펜스(줄거리의 전개가 관객에게 주는 불안감과 긴박감)가 부족하다 보니 예측 가능한 타이밍에 예측 가능한 싸움만 간간히 벌어졌고, 역시나 예측 가능한 결과만 되풀이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블랙 팬서>는 권력 승계 과정에서 일어나는 왕가와 친족 간의 갈등, 그중에서도 왕자와 숙부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사실 이 구조는 전 세계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디즈니의 <라이온 킹>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블랙 팬서>는 예상대로, 그리고 또 아쉽게도 <라이온 킹>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갔다.


<라이온 킹> 1994년 개봉


1. 왕과 왕자의 비극


  주인공인 <블랙 팬서>의 티찰라와 <라이온 킹>의 심바 모두 왕국의 왕자다. 티찰라는 다양한 부족이 모여사는 '와칸다 왕국'의 왕자고, 심바 역시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프라이드 랜드'의 어린 왕자다. 두 왕국 모두 초반에는 평화로운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는 무리들을 설정해둠으로써 잠재적인 갈등 요소를 보여준다.

  

왕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티찰라' 왕자(채드윅 보스만)
<라이온 킹>은 왕권을 되찾기 위한 왕자 '심바'의 스토리다


 더 의미 있는 공통점은 두 왕자들이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이자 선왕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티찰라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티차카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제모(다니엘 브륄)의 폭탄 테러로 피살당했고, 심바의 아버지인 무파사는 동생인 스카에 의해 절벽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다 보니 두 왕자들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고 또 거대한 왕국을 책임져야 하는 고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리는 야욕으로 가득 찬 적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두 왕자에게는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있다. 이 트라우마는 계속해서 주인공들을 억압하고 중요한 상황에서는 두 왕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갈등과 위기를 고조시키는 장치가 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위기를 극복하게 만들거나 갈등 상황에서 주인공을 반등하게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블랙 팬서>의 티찰라도 무의식 중에 아버지를 만나 의지와 용기를 회복했고, 심바 또한 어두운 밤하늘에서 아버지인 무파사를 만나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블랙 팬서>의 선왕 '티차카'는 <라이온 킹>의 선왕 '무파사'와 유사하다

* 참고로 영화 블랙 팬서에서 선왕 티차카 역할을 맡았던 배우 존 카니는 2019년 개봉 예정인 라이온 킹에서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의 목소리를 맡았다.

 

  이처럼 두 영화는 모두 '갈등이 잠재된 왕국'에서 '준비가 덜 된 왕자'들이 '예상치 못한 시기에 왕국을 승계'하게 되며 발생하는 '친족과의 갈등'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2. 숙부와의 갈등


  영화 <블랙 팬서>와 <라이온 킹>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갈등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동생인 숙부가 있다. <블랙 팬서>에는 와칸다 왕국의 비브라늄을 빼돌리기 위해 아버지 티차카를 배신한 '엔조부' 숙부가 있고, <라이온 킹>에는 왕국을 빼앗기 위해 아버지 무파사를 협곡으로 떠밀어버린 '스카'가 있다.


<블랙 팬서>의 '엔조부'는  <라이온 킹>의 '스카'와 유사한 역할을 맡는다


  두 숙부 모두 아버지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갈등의 시작점이 되는데,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라이온 킹>에서는 숙부가 아버지를 살해하지만 <블랙 팬서>에서는 아버지가 숙부를 살해한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와 숙부의 갈등이 왕자인 두 주인공에게 이어진다는 흐름은 서로 같다.


  <라이온 킹>에서도 1편에서는 심바와 숙부 스카의 직접적인 대립이 주를 이루지만 2편에서는 양아버지 스카의 복수를 꿈꿨던 양아들 '코부'와의 갈등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블랙 팬서>는 이와 유사하다. 티찰라 왕자는 사망한 숙부가 아닌 그의 아들 '에릭 킬몽거'와 대립한다. 에릭 킬몽거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리고 왕권을 빼앗기 위해 와칸다 왕국으로 돌아오는데 <블랙 팬서>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이다.


왕권에 도전하는 숙부 '엔조부'의 아들 '에릭 킬몽거'
스카의 양아들 '코부'


  <블랙 팬서>의 스토리 전개가 기대보다 평이하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핵심 갈등 구조 때문인데, 이 구조가 아쉽게도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왕권을 이어가려는 왕과 왕자 그리고 왕권을 빼앗으려는 숙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배신과 복수 스토리는 사실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예술 작품들, 특히 극을 통해 자주 이야기되어 왔고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아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다.




셰익스피어 기념관의 햄릿 동상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1616)


  <햄릿> 역시 덴마크의 왕자 햄릿의 숙부 클로디어스가 선왕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권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방황하는 왕자 햄릿의 고뇌와 복수를 담은 작품이다. 그러니 사실상 티찰라와 심바 그리고 햄릿은 모두 같은 처지다. 또한 숙부의 배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피살 그리고 왕권을 둘러싼 지독한 복수까지 세 작품 모두 유사한 갈등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만 왕자가 칼에 찔려 비극을 맞이하게 되는 <햄릿>과 달리 <라이온 킹>과 <블랙 팬서>의 왕자들은 왕권을 되찾고 평화를 맞이한다.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레이쇼> 외젠 들라크루아 (1839)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 최고의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햄릿>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갈등구조가 존재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은 바로 12세기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가 집필한 <덴마크인의 사적>이다. <덴마크인의 사적>에는 '암렛(amleth)의 이야기'가 실려있는데 이 역시 숙부에 의한 아버지 살해, 어머니와 숙부의 재혼, 방황하는 왕자와 피의 복수까지 <햄릿>과 같은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암렛 'amleth'의 마지막 철자인 h를 맨 앞으로 보내면 바로 'hamlet' 햄릿이 된다.


  이처럼 영화 블랙 팬서의 스토리 구조는 1994년의 <라이온 킹>을 지나 17세기 <햄릿> 그리고 그보다도 이전의 <암렛 이야기>와도 궤를 같이한다. 아쉬운 점은 이 '유명한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신선한 재해석을 해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3. 조력자들


  <라이온 킹>의 심바에게는 용감하고 성숙한 암사자 '날라'가 있다. 날라는 심바에게 든든한 친구이자 조력자인 동시에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블랙 팬서>의 티찰라에게도 정확히 똑같은 존재인 나키아가 있다. 나키아 역시 목숨을 걸고 티찰라를 돕는 동시에 다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티찰라와 나키아
날라와 심바


  심바에게는 날라 외에도 티몬과 품바라는 유쾌한 조력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티찰라에게는 용맹한 여전사 오코예와 천재 기술자인 여동생 슈리가 있다. 이 두 흑인 여성 캐릭터들은 기존 히어로물에 등장했던 어느 여성 조력자들보다 유능하고 강렬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슈리가 오빠 티찰라에게 첨단 장비를 소개해주는 장면이 <007 시리즈>를 짙게 연상시킨다는 점이다.


강인한 흑인 여성 캐릭터의 등장만으로도 영화계에 큰 의미를 남겼다
심바의 조력자 티몬과 품바


  또한 <블랙 팬서>에 성스러운 의식을 관장하는 현인 '주리'가 있다면 <라이온 킹>에는 심바의 탄생을 천하에 알리고 성스러운 의식을 관장했던 멘토 원숭이 '라피키'가 있다. 두 캐릭터 모두 주인공의 멘토 역할을 맡았으며, 무엇보다도 각각의 작품 속에서 신비로운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성스러운 의식을 관장하는 '주리(포레스트 휘태커)'
라이온 킹의 주술사 원숭이 '라피키'

 

  이처럼 영화 블랙 팬서에는 <라이온 킹>을 비롯해 다른 여러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이 많았다. 하지만 <라이온 킹>과 아주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인종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 저항했다는 점이다.


  디즈니의 <라이온 킹>이 개봉했을 때 많은 찬사가 있었지만, 사실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이유는 '선의 축'인 무파사가 외형상 백인을 연상시키는 반면 '악의 축'에 속하는 스카는 무파사와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피부가 검은 톤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스카의 조력자인 하이에나 역시 흑인인 '우피 골드버그'와 라틴계 배우가 더빙을 맡으면서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분명 어두운 피부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 흑인 목소리에 대한 편견이 <라이온 킹>에 투영됐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블랙 팬서>는 인종에 대한 편견을 뒤엎고 차별에 저항하는 새로운 '라이온 킹'이라고 볼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흑인 여성들이 용맹하게 전장에서 활약하고, 최첨단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보여준 것만으로도 분명 이전의 어느 작품들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을 축적시켰다 한번에 방출한다는 블랙 팬서의 필살기 마저도 흑인들의 비극적인 역사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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