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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Mar 04. 2018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피그말리온' 읽기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제75회 골든 글로브 감독상과 음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다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총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최고의 화제작으로 자리 잡았다. 영화는 물속과 밖을 넘나드는 판타지 스토리에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몽환적인 연출이 절묘하게 가미돼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고, 샐리 호킨스와 마이클 섀넌 등 배테랑 배우들의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연기까지 어우러지며 관객들의 기대를 가득 채워주고 있다.


<비우티풀>, <판의 미로>, <헬보이>, <블레이드2> 등을 제작, 연출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그 자체로 최고의 보증 수표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다소 심오한(?) 제목 때문에 개봉 전부터 많은 궁금증을 유발했다. '물의 모양'이라니 뭔가 '자연다큐' 스러운 제목에다가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오묘한 포스터까지, 영화는 괴상한 포장지로 멋스럽게 포장된 선물상자 같았다. 그래서인지 국내 개봉작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마치 원 제목을 첨삭해주는 듯 한 느낌의 독특한 부제지만 '사랑'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야 더 사랑받는 한국 영화 시장의 특성상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이 부제가 너무 직설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영화는 부제처럼 '사랑의 모양'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모양에 접근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다른 대상에게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판타지 영화의 메시지가 새삼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설적이게도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모양이 결핍되어있는 상실의 시대이기 때문 아닐까. 자신과 다른 대상을 향한 폭력이 난무하고,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차별이 짙어진 오늘. 완전히 다른 듯 또 비슷한 두 주인공의 로맨스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이런 점에서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피그말리온'과 함께 생각해볼 만하다.



1. '피그말리온'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

 

  '피그말리온 효과'로 더 유명한 피그말리온은 사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신화 속 인물이다.


피그말리온 효과 : 타인의 기대나 관심을 받을 때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쪽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뜻한다. 비슷한 개념으로 '자기충족적 예언' 혹은 '로젠탈 효과'가 있다.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키프로스(Cyprus) 섬의 조각가인 피그말리온은 성적으로 문란한 섬의 여성들을(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저주 때문) 피해 스스로 집 안에 틀어박힌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을 단절한 채 조각에 몰두하는데 눈처럼 하얀 상아를 가지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인상을 조각한다. 이후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 여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아프로디테 여신이 이 여인상을 실제 살아있는 여인으로 만들어준다. 그러자 피그말리온은 크게 감격하여 이 여인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또 결혼하게 된다.


<피그말리온> 장 밥티스트 레뇨 1786.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와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모두 '고립된 존재'라는 점에서 닮았다. 먼저 피그말리온이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스스로 고립된 공간에 틀어박힌 한편, 엘라이자는 말을 할 수 없는 캐릭터로 세상과 소통하는데 다소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과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지내는데, TV를 보거나 매일 아침 욕조에서 마스터베이션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다.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 모두 타인을 통한 즐거움보다는 스스로 만든 쾌락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존재다.


  또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 모두 보통의 대상이 아닌 완전히 다른 존재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그 대상은 사랑에 대한 상식과 모양을 파괴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모양에 대해 물음표를 되던진다. 둘 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상아상과 괴생명체 모두 인간이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직접 그 대상을 만들었고 엘라이자는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애정의 대상 모두 대화를 나누기 어렵고, 세상에서 고립된 존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는 각자의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지 모른다. 낯선 존재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바로 사랑의 원초적인 모양이다.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 입장에서는 상아상과 괴생명체 모두 나만큼 외로운 존재인 동시에 나 자신 그 자체여서 그 대상을 위로하는 행위가 곧 위로받는 행위가 된다. 또 그럴 수 있는 대상의 존재만으로도 내 존재의 명분이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라고 부르는 우리의 문화도 함께 생각해봄직하다.

  

두 주인공은 자신과 완전히 다른 대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후의 스토리는 더욱 비슷하다.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 모두 그 낯선 대상과 깊은 사랑에 빠진다.


  "피그말리온은 이 상아상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상아상을 껴안기도 했으며 어쩌면 눌렀던 자국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손가락으로 이 상아상의 살갗을 꾹 눌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혹 상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너무 깊이는 누르지 않았다. 보라색 천을 씌운 긴 의자에 이 처녀를 눕히고, 그렇게 하면 처녀가 고마워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리 밑에는 베개를 받쳐주기도 했다"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중에서

  

  삶은 달걀을 가져다주며 수화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까지 들려주었던 엘라이자의 모습과 피그말리온의 모습은 닮았다.


피그말리온의 심정도 엘라이자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불가능해 보이던 이들의 사랑은 모두 현실이 된다. 피그말리온의 상아상은 간절한 기도 끝에 실제 여인이 되고, 엘라이자의 낯선 생명체는 실험실을 빠져나와 엘라이자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게 된다.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의 '고독한 공간'은 모두 '사랑의 공간'으로 바뀐다. 특히 은밀한 마스터베이션의 공간이었던 엘라이자의 화장실은 다른 존재를 통한 마스터베이션, 즉 섹스의 공간으로 바뀐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안 루이 지로데 드 루시 트리오종. 18세기경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바로 상아 처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피그말리온의 입술에 닿는 처녀의 입술에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었다가는 다시 입술을 대고 손으로는 가슴을 더듬어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손 끝에서 그렇게 딱딱하던 상아가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상아상은 인간이 되었다. 피그말리온은 이 상아상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고...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중에서


그림속 피그말리온과 엘라이자의 표정은 묘하게 닮았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피그말리온'과 <셰이프 오브 워터>에 모두 3번의 불꽃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먼저 '피그말리온'의 경우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아프로디테가 기도를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하늘에 세 번 불길을 치솟게 한다. 이후 아프로디테는 상아상을 실제 여인으로 만들고 피그말리온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게 한다. 한편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악역 리차드 스트릭랜드가 쏜 3발의 총성이 날카롭게 빗줄기를 가른다. 완전한 이별을 의미할 것 같았던 이 3번의 불꽃은 오히려 완전한 결합으로 이어진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지만 사실 숫자 3은 고대 로마시대 이전부터 완전함을 상징했고 신성시되어왔다. 특히 초기 로마의 '3두 정치'가 그 예이며, 기독교의 삼위일체 또한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또 동양에서 3은 '양'을 의미하는 1과 '음'을 의미하는 2가 결합된 완전한 숫자다. 즉 음양이 조화를 이룬 숫자이며 동시에 새로운 자손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두 작품 속 3번의 불길은 우연인 듯 아닌 듯 특별한 결합의 의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


  '피그말리온'과 <셰이프 오브 워터> 두 이야기의 결말 또한 닮은 점이 많다. 먼저 '피그말리온'에서는 사랑의 결실을 맺은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가 9개월 뒤에 아이까지 낳는다.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괴생명체가 엘라이자를 물속으로 데려가 새로운 삶을 부여하고 키스를 나눈다. 영화 중반부까지 사랑의 주체였던 엘라이자는 영화의 끝 부분에서 사랑의 대상이자 갈라테이아가 된다.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형태의 완전한 결합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경
엘라이자와 괴생명체 모두 서로가 서로에 대한 '갈라테이아' 였을지 모른다



2.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



  신화 속 '피그말리온' 외에도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쓴 동명의 희곡 <피그말리온>에도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다. 버나드 쇼는 작품의 제목 그대로 신화 속 '피그말리온'을 모티브로 작품을 썼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엘라이자'라는 것이다. 극의 간단한 스토리는 이렇다.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 교수'는 친구인 '피커링 대령'과 독특한 내기를 하게 된다. 내기의 내용은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는 하층민 '엘라이자'를 데려와 정해진 기간 안에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우아한 여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히긴스 교수는 끊임없이 엘라이자를 교육시켜서 끝내 엘라이자를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여인으로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엘라이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노벨상 수상작가 '조지 버나드 쇼'와 1913년에 초연된 <피그말리온>


  희곡 <피그말리온> 역시 완전히 다른 두 인물이 서로 공감하게 되고 결국 애정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엘라이자와 비슷한 듯 다르게 <피그말리온>의 엘라이자 역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구사한다.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새롭게 태어난 애정의 대상인 엘라이자가 결국 스스로의 삶을 찾아 떠난다는 것이다.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은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이름의 영화로 개봉되기도 했다. 엘라이자 역은 무려 '오드리 헵번'이 맡았고 영화는 1965년 제 3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까지 수상했다. 덕분에 작가 버나드 쇼는 노벨상과 아카데미 상을 모두 수상하는 업적을 이뤘다. 그로부터 53년 뒤인 2018년, 또 다른 ‘엘라이자’ 샐리 호킨스가 열연한 <셰이프 오브 워터> 역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을까?


오드리 헵번이 열연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1964.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보여준 사랑의 모양은 정말 물과 같았다. 때로는 창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과도 같아서 세상을 온통 울퉁불퉁 왜곡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욕조에 가득 찬 따뜻한 물처럼 존재를 위로해 주거나 본능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하고 또 부두에 가득 흘러든 물처럼 저항할 수 없는 만남인 동시에 금방 어딘가로 떠나버리는 이별이기도 하다. 사랑은 정말이지 물과 같아서 어디에나 있지만 또 때로는 어디에도 없기도 하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엘라이자의 이웃 '자일스'가 읊조리는 시 한 구절은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불완전하면서도 완전한 사랑의 모양을 보여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샐리 호킨스의 연기가 돋보였다.

 

  

Unable to perceive the shape of you, I find you all around me.

Your presence fills my eyes with your love.

It humbles my heart for you are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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