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피겨스케이팅 스토리
현존하는 최고의 악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발칙하게 재현해낸 영화 <아이, 토냐>는 단연 토냐 하딩을 완벽하게 묘사해낸 '마고 로비'와 악독한 엄마 역을 맡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까지 수상한 '앨리슨 재니'의 열연이 돋보였다. 특히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유일하게 건진 매력적인 캐릭터 '할리퀸'으로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줬던 '마고 로비'는 이번에도 인생 캐릭터를 갱신하며 토냐 하딩의 인생을 역동적으로 묘사했다. 분명 피겨 스케이팅 연기뿐만 아니라 엄마와의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해 축적됐을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연기해 내는 것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고 로비는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줬고 토냐 하딩이라는 캐릭터를 더욱 입체적으로 빚어냈다.
영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피겨 스케이팅은 정말 백조의 호수와 같다. 아이스 링크 위에서는 고요하고 한없이 우아하지만 그 밑에서는 쉼 없이 움직여야 하고 생존을 위해 발버둥 쳐야 한다.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늘 새로운 기술을 연마해야 하고 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선보여야 한다. 토냐 하딩 또한 '트리플 악셀' 점프를 갈고닦아 세계적인 선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그녀를 수식하는 가장 유명한 표현 역시 '미국 여성 최초 트리플 악셀'이다.
트리플 악셀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왜 수많은 선수들이 선수 생명을 담보로 이 고난도 점프를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것일까. 영화에 담기지 않은 혹은 영화와 관련된 '피겨 스케이팅'의 흥미로운 스토리를 몇 가지 정리해봤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세기의 경쟁 때문이기도 하지만 피겨 스케이팅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을 하나 꼽으라면 역시 '트리플 악셀'을 꼽을 수 있다. 여기서 트리플 악셀은 앞으로 점프해서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고 이후 뒤로 착지해서 반 바퀴를 더 돌아 총 3바퀴 반을 도는 고난도 점프 기술이다. 이 점프가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난이도가 매우 높고 위험해서 시도하는 선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연아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의 강력한 필살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 모든 종류의 점프 기술을 연마한 김연아도 실전 무대에서는 시도하지 않았고, 아사다 마오의 트리플 악셀 역시 회전 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트리플 악셀의 '악셀'은 앞으로 뛰어서 뒤로 착지해 반 바퀴를 더 도는 점프 기술을 의미한다. 뒤로 점프해서 뒤로 착지하는 다른 점프 기술들에 비해 난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술 점수 또한 다른 점프에 비해 매우 높다. 트리플 살코와 트리플 러츠가 각각 4.2점과 6.0점인 것에 비해 트리플 악셀은 무려 8.5점이다.
ㆍ살코(salchowㆍ4.2점) : 한 발 안쪽 에지 점프, 다른 발 바깥 에지 착빙
ㆍ러츠(lutsㆍ6.0점) : 한 발 바깥 에지 점프, 다른 발 안쪽 에지 착빙
ㆍ악셀(Axelㆍ8.5점) : 유일하게 앞에서 뛰어 뒤로 착빙. 한 발 바깥 에지 점프, 다른 발 바깥 에지 착빙
출처 : 피겨스케이팅 점프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그렇다면 여기서 '악셀'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 엑셀을 힘차게 밟는 느낌을 떠올리며 'tripple accel(accelerate:가속하다)'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악셀은 'Axel', 즉 이 점프와 관련된 사람의 이름을 의미한다. 이 유명한 악셀 점프의 유래를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봐야 한다.
초기의 피겨 스케이팅은 얼음 위에서 일정한 모양의 도형을 스케이트 날로 그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얼마나 정확하게 움직이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매우 딱딱하고 기계적인 스포츠였고 주로 남자들이 즐기던 스포츠였다. 하지만 이런 초기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이 등장했는데, 바로 '잭슨 하인즈(1840-1876)' 현대 프리 스타일 피겨 스케이팅의 아버지다. 그는 발레 무용수 출신으로, 그의 전공답게 피겨 스케이팅에 현재와 같은 예술성을 더하며 피겨 스케이팅을 좀 더 예술적인 스포츠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뒤를 이어 피겨 스케이팅계의 또 다른 전설이 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트리플 악셀 점프의 주인공 스웨덴의 '악셀 파울젠(Axel Paulsen)'이다. 그의 이름을 딴 악셀 점프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그가 바로 악셀 점프를 처음으로 선보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초로 악셀 점프가 세상에 등장한 것은 무려 188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세계 스케이팅 모임'이었다. 여기서 악셀은 1회전 반의 아름다운 점프를 선보이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여기에 다양한 스케이팅 기술도 도입시켰다. 이후 사람들은 그의 점프를 따라 하기 시작했는데 이 점프는 그의 이름을 따 '악셀 점프'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악셀 점프 외에 김연아 선수가 완벽하게 구사했던 살코 점프나 러츠 점프는 어떨까? 역시 이 또한 이 점프를 창시한 전설적인 선수들의 이름에서 왔다. 특히 살코 점프를 선보인 울리히 살코(Ulrich Salchow)는 1901년부터 1911년까지 총 10번의 세계 선수권 타이틀을 따낸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영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냐 하딩은 '미국' 여자 피겨 선수 중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선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세계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여자 선수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자 피겨무대에서 불가능의 영역처럼 보였던 '트리플 악셀'을 최초로 성공시킨 선수는 누구일까? 대부분 신체 조건이 뛰어난 서양계 선수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의외(?)로 그 주인공은 바로 일본의 '이토 미도리' 선수다.
'이토 미도리'는 만 8세에 이미 트리플 점프를 성공시키며 점프 기술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1988년 '제 2회 NHK배 월드 챔피언십'에서 여성 피겨 선수로는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켰다. 일본의 피겨 스타 '아사다 마오'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이기도 한 이토 미도리는 화려한 점프 기술뿐만 아니라 압도적인 점프 높이로도 유명하다. 미도리 선수가 트리플 악셀을 뛸 때의 점프 높이는 약 64cm에 이르는데 이는 최근 남자 피겨 선수들의 점프 높이보다도 높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피겨 역사를 통틀어 가장 먼저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기준에 따라 기록이 다르긴 하지만 동계 올림픽 사상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완벽하게 구사한 선수는 바로 김연아 선수의 코치였던 '브라이언 오서'다.
브라이언 오서는 현재 훌륭한 지도자로 자리 잡아 많은 정상급 선수들의 코치를 맡고 있지만 본인이 현역 선수였던 시절에는 화려한 피겨스타였다. 특히 브라이언 오서는 1984년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트리플 악셀'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트리플 악셀 점프' 자체를 유명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의 점프는 예술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덕에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현재 여자 피겨에서 가장 높은 난이도의 점프를 구사하고 있는 선수는 누구일까? 정답은 베테랑 선수도, 신체조건이 탁월한 피겨 스타도 아니다. 바로 만 13세의 러시아 피겨 신예 '알렉산드라 트루소바'다.
'알렉산드라 트루소바'는 지난 3월 11일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2018 국제 빙상경기연맹 세계 주니어 피겨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여자 피겨 사상 최초로 한 무대 두 번의 '쿼드러플 점프'를 성공시켰다. 쿼드러플 점프는 공중에서 4바퀴를 도는 고난도 기술로 현재 남자 피겨선수들도 어려워하는 점프다. 지금은 은퇴한 일본의 '안도 미키' 선수가 2002년에 '쿼드러플 살코' 점프를 한 차례 성공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현역 선수로는 '알렉산드라 트루소바' 선수가 유일하다. 또 그녀는 한 무대에서 2번의 쿼드러플 점프를 성공시킨 것과 함께 '쿼드러플 토룹' 점프를 성공시킨 최초의 여자 선수로 기록되었다.
고난도의 점프를 구사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하고 또 높은 점수를 받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최고의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스터 트리플 악셀 브라이언 오서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에 그쳤고 토냐 하딩도 순위에 들지 못했다. 미스 트리플 악셀 이토 미도리 또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다. 뿐만 아니라 높이 뛰고 빠르게 회전해야 하는 만큼 트리플 악셀을 주 무기로 삼았던 선수들은 선수 생활 내내 끝없는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높은 기술점수에 대한 대가는 그 이상으로 가혹했다.
불미스러운 피습에 의해 큰 부상을 당했던 '낸시 캐리건'이야말로 토냐 하딩 때문에 가장 쓴 맛을 본 사람이었을 것이다. 참고로 <아이, 토냐> 영화 개봉을 두고 낸시 캐리건과 그녀의 팬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영화가 토냐 하딩의 입장만 대변하고, 피습 사건을 미화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낸시 캐리건'은 바빠서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영화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기도 했다.
“I haven’t seen the movie. I’m just busy living my life... I was the victim. Like, that’s my role in this whole thing. That’s it.”
- 낸시 캐리건. <아이, 토냐> 개봉 이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 중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면, 불행 중 다행으로 꿈의 무대였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됐던 낸시 캐리건은 7주 만에 부상에서 회복했고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본인 올림픽 경력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며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해프닝으로 인해 빛을 본 사람과 씁쓸한 맛을 본 사람이 또 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먼저 낸시 캐리건이 다시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올림픽 출전권을 다시 반납해야만 했던 선수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미셸 콴' 선수다. 미셸 콴은 올림픽 출전 선수권에서 토냐 하딩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올림픽행 티켓을 쥐었었지만, 아주 잠시나마 낸시 캐리건의 빈자리를 채웠던 것에 만족해야 했다. 미셸 콴 선수에게는 기쁨과 아쉬움이 크게 교차했을 순간이자 어찌 보면 굴욕적인 순간일 수 있었겠지만 그 후 미셸 콴 선수는 잘 알려진 대로 세계적인 피겨 선수로 성장했다.
또 우여곡절 끝에 낸시 캐리건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자 전 세계의 관심은 이 둘 중 누가 금메달을 딸 것인지에 쏠렸다. 특히 고난도의 점프를 주 무기로 하는 토냐 하딩과 안정적이고 예술적인 무대를 선보이는 배테랑 낸시 캐리건의 대결 포인트만으로도 많은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작 금메달은 이 두 선수가 아닌 우크라이나의 '옥사나 바이울'이라는 선수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영화에 나온 대로 낸시 캐리건은 은메달 그리고 토냐 하딩은 8위를 기록했다. 두 사람의 다소 지저분한(?) 갈등 사이에서 완전히 새로운 선수가 빛을 본 순간이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깼던 이변이었다. 동시에 낸시 캐리건이 아주 간발의 차이로 2위로 밀리면서 많은 논란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옥사나 바이울은 피겨 무대에서 흔치 않았던 발레복을 입고 출전했고, 그에 맞춰 발레 기술을 절묘하게 활용하여 역사상 가장 예술적이었던 무대 중 하나로 기록될만한 경기를 펼쳤다. 특히 그녀가 쇼트 프로그램에서 선보인 'Swan Lake' 무대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그녀의 무대 이후로 예술성의 중요도가 더욱 높아지기도 했다.
영화의 각본을 준비한 제작진이나 연출자의 입장에서는 토냐 하딩의 인생 스토리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 영화에 포함시킬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이유는 그녀의 인생 전체가 다양한 사연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은 막 스케이팅을 시작했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무한 악셀'같다. 영화의 끝 부분에서 볼 수 있듯이 토냐 하딩은 실제 복싱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사실 그 무대에 서기 전에도 다양한 직업을 넘나 들었다. 이 글의 끝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정리해봤다.
먼저 1994년 토냐 하딩은 무려 '프로 레슬링' 무대에 매니저로 등장했고, 1995년에는 밴드 The Golden Blades 의 보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토냐의 무대에는 온갖 쓰레기와 음료병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후 2002년에는 영화의 엔딩처럼 복싱 무대에도 섰는데, 멋지게 데뷔전에서 승리했지만 앓고 있던 천식 때문에 복싱선수 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종합 전적은 3승 3패였다. 이후 토냐 하딩은 각종 TV쇼에도 출연하고 조경일을 하며 생활하다가 현재는 여섯 살짜리 아들을 위해 전업 주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피겨 스케이팅 은퇴 이후의 삶 또한 영화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