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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Aug 20. 2018

기억의 메커니즘, 영화 <이터널 선샤인>

feat. <인사이드 아웃>

  잊으려 하면 잊을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도 간절히 원하고 있을 바람일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며 뒤척이는 긴긴 밤들이 쌓이고 쌓여도 오히려 선명해지는 '기억'들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매 순간 수많은 기억들을 망각하며 살면서도 정작 어떤 기억들은 평생을 짊어진 채 살아가기도 한다.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에 저항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어떤 특별한 업체(라쿠나사)를 찾는다. 조금 수상하긴 하지만 이 곳에서는 사람들의 기억을 그것도 원하는 기억만을 삭제해준다. 주인공 조엘(짐 캐리)은 너무나도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과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라쿠나사를 찾는다.


라쿠나(Lacuna) : 영어로 (글, 생각)에서의 빈틈 / 포루투갈어로는 '탈락'을 의미한다


   정말 잊으려 하면 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랑도 지울 수 있을까? 영화가 던지는 이 매력적인 질문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을 정리해봤다. 인간의 뇌가 담당하는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을 소개한다.


잊으려 하면 잊을 수 있을까?

  

1. 기억의 메커니즘

  

  뇌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떠한 의도에 의해 다시 회상될 수 있는 정보들 혹은 그 행위 자체를 우리는 '기억'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기억'은 앨범에 잘 정리되어있는 사진이나 창고에 쌓여있는 물건들에 비유되곤 한다. 좋은 예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을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도 ‘기억’은 거대한 도서관과 다름없는 '기억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이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종류에 따라 알록달록한 색깔의 구슬로 ‘낱개 포장’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실제 인간의 기억은 어떨까?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기억들도 이처럼 알록달록한 구슬들과 닮았을까?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저장소'

  

  아쉽게도 인간의 기억은 <인사이드 아웃>과는 조금 다르다. 실제 인간의 기억은 개별 포장되는 구슬도 아니고 USB도 아닌, 거대한 네트워크에 흩어져 저장된다. 다시 말해 기억은 어떤 독립된 저장소에 '덩어리' 상태로 저장된다기보다는, 우리 뇌에 존재하는 '촘촘한 네트워크'에 분산되어 저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기억을 회상한다는 것은 완전한 형태의 '기억 덩어리'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재결합시키는 과정에 가깝다.


  그렇다면 우리 뇌에 존재한다는 이 '촘촘한 네트워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뉴런(신경계를 이루는 기본적인 단위 세포)'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뉴런의 구조 (출처:두산백과)

 

  인간은 여러 감각기관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습득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느끼고, 냄새를 맡으며 맛을 본다. 이렇게 습득된 정보를 처리하는 가장 기본 단위의 세포가 바로 '뉴런'이다. 우리 몸 전체에 분포하고 있는 뉴런은 역시 뇌에도 빽빽하게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 뇌에 존재하는 뉴런의 수만 해도 대략 1000억 개에 이른다.


  여기서 1000억이라는 숫자는 대체 얼마나 큰 수일까? 익숙하지 않은 수라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은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별들을 떠올려보면 된다. 우리 은하에 약 1000억 에서 2000억 개의 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뇌에는 우리 은하의 별만큼이나 많은 뉴런들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뇌가 '소우주'에 비교되는 이유이자, 인체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해마에 있는 뉴런들(출처:위키미디어 코먼스)


  앞서 언급했던 '촘촘한 네트워크'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특별한 네트워크는 바로 별처럼 수많은 뉴런들의 네트워크다. 하지만 이 네트워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뉴런 내부에 기억이 저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저장되는 곳은 어디일까? 조금 더 정확히 말해 기억은 뉴런과 다른 뉴런이 연결되는 접합부인 '시냅스'에 저장된다.


뉴런은 시냅스를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시냅스’에서 이렇게 중요한 작업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정작 시냅스의 크기는 세균 한 마리 정도의 크기인 ‘1만 분의 1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고작 시냅스에 정보가 얼마나 저장될 수 있을까'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시냅스를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의 뉴런이 수천에서 수십만 개의 시냅스를 형성할 수 있고 또 각각의 뉴런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인간의 뇌에는 산술적으로 약 1000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00조 개에 이르는 시냅스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까? 인간의 뇌에 존재하는 시냅스에는 무려 미국 의회도서관 장서의 15~30배 정도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의 뇌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미국 의회 도서관

  

  그렇다면 흩어져 저장된 기억들이 재조합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했던 저녁 식사를 한번 떠올려보자. 아마 그날의 풍경이 완성된 형태로 재연되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이었던 부분들부터 하나 둘 떠오를 것이다. 꽤 훌륭했던 음식의 맛과 친구가 새로 샀다고 자랑했던 옷의 촉감. 조금 시끄러웠던 음악과 어떤 손님의 짙은 향수 냄새까지. 이처럼 다양한 감각기관들을 통해 습득한 입체적인 정보들은 뇌 곳곳에 흩어져 존재하다가 어떤 자극에 의해 재결합되고 기억을 완성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기억은 왜곡되기도 쉽다. 다시 그날 저녁에 먹었던 음식을 떠올려보자. 혹시 친구가 옷을 자랑했던 날은 그 다음날 저녁이 아니었는가? 식당에서 틀었던 음악은 어땠는가? 정말 시끄러운 음악들이었는가? 다시 깊이 생각해보거나, 휴대폰에 저장했던 그날의 사진들을 확인해 보면 처음 회상됐던 기억과는 많은 부분이 다를 수 있다. 뇌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재조합하다 보니 완전히 다른 시기의 기억들이 뒤섞이기도 하고 심지어 경험한 적도 없는 정보들을 실제 경험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도 조엘의 기억들이 뒤죽박죽 뒤섞이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눈 쌓인 해변 위에 침대가 놓여있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조엘과 어른 클레멘타인이 한 공간에 같이 있기도 하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집에서 헤매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은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과 오랜만에 모인 자리는 늘 즐거울 수밖에 없다. 기억은 늘 ‘진실’보다는 ‘회상하는 주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근법을 역으로 이용해 CG없이 연출한 장면
조엘의 왜곡된 기억들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2. 기억의 종류

 

  이처럼 다소 엉성하기도 한 인간의 기억은 지속되는 기간에 따라 크게 '단기 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분류된다. 먼저 '단기 기억'은 아침 출근길에 봤던 광고지의 전화번호나 휴대폰 메시지로 받은 본인 인증번호처럼 체 하루도 지나기 전에 사라져 버리는 기억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짧은 기억들 중에서도 하루 이상 지속되는 기억들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러한 기억들을 ‘장기기억’이라고 한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이 지우고자 했던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은 대부분 장기기억들이다. 그 기억들은 조엘의 뇌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망각에 저항한다.


  그렇다면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시험공부를 하거나 중요한 숫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계속해서 학습을 반복하듯이 해당 기억의 정보들을 반복 학습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러한 반복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되면 해당 기억의 조각들을 저장하고 있는 시냅스들의 구조가 변하면서 더욱 크고 단단해지는데 이러한 과정을 '경화(Consolidation)'라고 한다. 실제로 단기 기억일 때는 뉴런과 뉴런 사이에 단단한 시냅스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신경전달물질이 좀 더 많이 분출되며 잔상의 형태로 기억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경화’를 통해 시냅스가 단단한 형태로 형성되면 해당 기억의 조각들을 좀 더 오랜 기간 저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조엘이 지우고자 했던 ‘아픈 기억’들도 대부분 클레멘타인과 함께 그리고 클레멘타인에 의해 형성된 ‘장기기억’들이다. 조엘의 뇌는 오랜 기간 잦은 회상 작용을 통해 천문학적인 수의 단단한 시냅스들을 형성했을 것이고, 이 과정에서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은 아주 단단한 장기기억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아주 작은 자극만 주어지더라도 순식간에 기억들을 조합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에는 ‘행복’이라는 달콤한 보상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기억의 조각들을 끌어 모으는 가장 좋은 매개체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인해 조엘의 기억 조합 공식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비극이 발생한다. 바로 클레멘타인과의 이별이다. 이제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은 고통과 불편함만 남길뿐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반복된 달콤한 보상으로 인해 조엘의 뇌는 자꾸만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을 조합하려 한다. 원치 않은 순간에도 이러한 과정은 계속해서 멈추지 않는다. 깊은 사랑의 후유증이다.


  '라쿠나사'의 연구원들은 조엘의 뇌 이곳저곳을 조사하며 이와 같은 장기기억들을 지워나간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이들이 개발한 특수 모니터를 통해 특정 기억을 추적하고 삭제 명령을 내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실제 ‘장기기억’의 조각들은 주로 어디에 저장되는 것일까? 특정 기억이 저장되는 곳을 찾아낼 수 있을까?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다니며 삭제하는 '라푸나사'의 직원들

  

  이들이 개발한 특수 모니터 화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뇌의 표면 여기저기에 장기 기억들이 표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실제 인간의 장기기억 역시 '뇌의 껍질'에 해당되는 '신피질'에 저장된다. 기억을 담당하는 곳은 뇌의 '해마'지만 해마에 모든 기억이 다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해마는 주로 기억들을 분류하고, 단기 기억들을 잠시 보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장기기억으로 분류된 특별한 기억들은 신피질 이곳저곳에 흩어지고 더 안전하게 저장되는 것이다. 때문에 특정 장기기억들을 추적하여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장기기억을 억제하는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어떠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삭제한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정보를 학습하거나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어느 정도 주체의 의지대로 가능하지만 그 반대인 ‘망각의 메커니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깊은 사랑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울 수 있을까?라는 매력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후유증을 앓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봤을 질문일 것이다. 매우 현실적인 주제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내는 ‘미셸 공드리’ 영화의 특징이다.


케이트 윈슬렛, 미셸 공드리 그리고 짐 캐리

#이터널선샤인


다음 글에서 계속.


<이터널 선샤인>에서 '망각' 읽기

3. 잊으려 하면 잊을 수 있을까

4.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다시 만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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