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세월호, 101분의 기록> 제작기
안산역 맞은편 카페
짧은 문자 한 통을 보내기까지 몇 번을 지우고 다시 썼는지 모른다. 세월호 희생자 고 박○○ 학생의 아버님께 잠시 통화 괜찮으신지 여쭤보기 위한 문자였다. 이어진 통화에서 우리는 방송 제작 계획을 조심스럽게 설명드리면서 직접 찾아뵙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몇 차례 더 문자를 쓰고 지우고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처음 안산으로 향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오전 11시 ‘탑승객 전원 구조 오보’로 부터는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린 뒤였다.
안산역 맞은편 카페였다. 카페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아버님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약속시간에 늦은 것은 아니었지만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온 인사말이었다. 악수를 나누고 고민 끝에 명함을 드렸다. 아버님의 시선이 한동안 내 명함에 머물렀다.
많이 원망스럽습니다
아버님은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진도를 향해 그야말로 죽음의 질주를 하셨고 ‘전원 구조’ 속보 이후 뉴스 화면에서 아들과 꼭 닮은 생존 학생을 보시고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짧은 안도는 더 큰 절망으로 돌변했고, 믿었던 뉴스는 순식간에 표정을 달리했다. 그리고는 그것이 끝이었다.
앞에 앉은 아버님은 담담한 목소리로 지난 3년의 시간을 되돌렸다. 그리고 한 번에 읽어내기도 어려운 전문 용어들과 수많은 책임자들의 이름을 막힘없이 언급하셨다. 머리에 기억된 것이 아니라 가슴에 사무쳤을 이름들과 시간들. 언론에서 제때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수많은 이야기들까지. 한 번 보기도 힘든 수많은 사진과 영상 자료들을 수백 수천 번 돌려보셨을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나의 시선은 커피가 담긴 하얀 잔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다.
미안해요,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봤습니다
아버님은 3년간 짓물러온 상처를 뒤로하고 오히려 나에게 미안하다며 웃어주셨다. 나는 그제야 아버님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아버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아버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마치 화석처럼 굳어 더 이상 흘러내리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우셨을까.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참아오셨기에 이렇게 눈물이 단단하게 맺혀 있을까.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목포항 천막
본격적인 취재를 막 시작했을 때 세월호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는 말없이 옆으로 돌아누운 아이처럼 세월호가 뭍에 간신히 기댔다. 어두운 바다 위로 야속할 만큼 하얗게 고개만 내밀다 사라져 버린 세월호. 1000일도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어두운 얼굴을 하고 부모님들을 향했다. 그러자 목포항에는 화석처럼 고여 있던 수많은 눈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4·16가족협의회분들께 인사드리고 이번 방송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 위해 목포로 향했다.
하지만 근처를 서성이며 멀뚱멀뚱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목포에 먼저 가 있던 몇몇 기자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찾아뵈었다가 그럴 자격이 있냐는 꾸중을 듣고 돌아왔다’는 말을 해주고 간 터였다. 그렇게 한마디 인사말보다 세찬 빗방울이 먼저 목포항에 쏟아졌다. 목포항에는 철망을 뒤덮은 노란 리본들이 넓은 천막처럼 가득했지만, 바람과 비를 피할 제대로 된 천막은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누구 하나 투덜거리는 사람 없었다. 그렇게 원망할 수 없는 비가 며칠을 더 오고 갔다.
함부로 용서를 구할 수도 없었다. 그저 다음날이 돼서야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릴 수 있었고 또 그다음 날이 돼서야 명함을 드릴 수 있었다. 이제라도 찾아와 줘 반갑다는 말씀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할 수 있겠냐는 말씀에는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의미 있는 방송을 만들어보겠습니다
세월호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가족분들에게 약속을 드리고 돌아섰다. 담배를 연달아 태우시던 아버님께서 작은 사과주스를 손에 쥐여주셨다.
비 오는 제주도
목포에서 소개받은 연락처를 들고 이번에는 제주도로 향했다. 세월호가 닿지 못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비 내리는 제주도가 멀게만 느껴졌다. 많은 탑승객들을 소방호스로 끌어올려 구조해낸 생존자 김 씨를 만나 뵈러 가는 길. 이번에는 어떤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김 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서늘한 표정을 예상했지만 의외였다. 그는 지금껏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참사 직후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려 하는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우리는 찬물에 들어가는데 아저씨만 뜨거운 물에 들어가세요?’라고요
그날 이후 김 씨는 너무나도 큰 고통과 죄책감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죽을힘을 다해 소방호스를 끌어올렸던 손가락들은 모두 뽑혀나갈 듯 매시간 아파오고, 바람에 휘날리는 본인의 머리카락이 고통스러워 머리를 기를 수도 없다는 김 씨.
충분히 더 살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살리지 못했어요…
그는 사람을 살리고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했다. 세월호가 남긴 상처는 이처럼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었다.
4시 16분, 아버님의 거실
다시 경기도로 돌아와 고 박○○ 학생의 아버님 댁에서 인터뷰를 마쳤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아들의 사진으로 가득한 거실을 나서는데 사진 옆에 오래된 시계가 보였다.
아들 방 쪽에 걸려 있던 시계였어요
아득한 표정으로 말씀을 꺼내신 아버님. 시침과 분침은 각각 4시와 16분에 멈춰 있었다. 다른 유가족들 중에는 매일 4시 16분에 알람을 맞춰두고 있는 분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를 여쭙자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참사. 아직도 밝혀내야 할 진실이 안팎으로 가득한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기억은 다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게는 잊히지 않을 고통으로 깊이 새겨진 반면, 잊지 않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게 잊히는 듯했다.
ON AIR
많이 늦었습니다. 부족하지만 덕분에 방송 완성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방송은 예정된 시간에 전파를 탔다. 하지만 방송 전 인터뷰에 응해주신 유가족, 생존자 그리고 여러 관계자분들에게 차마 방송을 봐달라는 말씀은 드릴 수 없었다. 그저 방송 다음날 한 줄 문자로 감사함과 죄송함만 전했다.
3년 전 세월호는 침몰했지만 그 직후 또 다른 세월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멀끔한 차림을 한 엘리트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고, 평범한 우리 이웃의 얼굴이기도 했으며 카메라를 든 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기도 했다.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곳저곳을 다니며 염치도 없이 꺼내 들었던 이 질문은, 사실 지난 3년간 내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던 질문이었다.
‘그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