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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호기 Jun 13. 2017

<성소수자 인권, 나중은 없다>

2017.5.30  <PD수첩>

  문재인 당시 더불어 민주당 전 대표가 찬조연설을 했던 한 포럼에서 울려 퍼졌던 ‘나중에’를 기억한다. ‘나중에’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긴 했지만 정작 문재인 당시 전 대표에게 성소수자들이 주장했던 내용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고 그들의 ‘돌발행동’은 비판받았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든 그들은 ‘나중’으로 밀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체 영상을 다시 보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된 것이지만 그들이 현장에서 외쳤던 것은 ‘여성인 동시에 성소수자인데 자신의 권리를 반으로 쪼갤 수 있는가’였다.


  사람은 단 한 가지 정체성만으로 정의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 보기에 단순한 존재일지라도 ‘한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사람과 사람들이 모여 또 다시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을 구성한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강하거나 약하거나 혹은 다수이거나 소수인 어느 범주에 다양하게 포함될 수밖에 없다. 무심코 거리를 걷는 순간과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는 순간 그리고 익숙한 사람들 틈에 서있거나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매 순간 순간에도 존재는 스스로를 새롭게 정의하고 증명하며 다수와 소수 사이를 오간다. 누군가에게 ‘소수자’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그 딱지 한 장 달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다수가 소수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사회 내 소수자들의 권리는 매우 중요하고 또 그만큼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그것은 언제든 내 가족의 이야기일 수 있고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분명 누구나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다양한 정체성을 띄는 사회일수록 소수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권리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차별금지법도 그 중 하나다.

 

  차별금지법은 사회 내 다양한 존재들을 대상으로 모든 종류의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은 사실 소수와 다수의 개념을 떠나 우리 모두를 위한 선언이고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며 가장 인간적인 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미 전 세계 20개도 넘는 국가에 차별 금지법이 입법화 되어있고, 유사한 의미를 담은 포괄적인 법까지 포함한다면 훨씬 더 많은 나라에서 법적으로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10년째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어느 중심가에서 빨간색 광고지를 나눠주고 계시던 분들을 만났다. 종이에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차별금지법은 사실 동성애조장법이고 동성애는 에이즈를 유발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은 우리를 위협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분들이 보편적으로 내세우는 논리와 같아 보였다. 광고지를 정독하고 나서 보다 구체적인 이유를 물었다. 그분은 조심스럽게 항문성교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항문은 순대와 같이 약한 곳인데 동성애자들은 항문으로 성교하기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다고 했다. 그 이상의 이야기는 이곳에 그대로 옮겨 적기도 방송에 내보내기도 어려웠다. 대신 그분을 포함하여 취재 중 만났던 차별금지법 반대자들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해봤다.

 

1. 차별금지법 = 동성애 인정, 동성애 조장법

2. 동성애 = 항문성교, 변태성욕 = 에이즈 주원인

3. 차별금지법 = 에이즈 확산 = 위험


  이 분들의 말처럼 동성애가 정말 에이즈의 주원인이라면 그리고 ‘국가의 건강을 위협하는 변태성욕’이라면 국가적으로 대책을 세워야할 일이다. 하지만 이 논리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보기 전에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럼 항문성교를 하지 않는 남성 동성애자들이나 여성 동성애자들은 괜찮은 건가요?”


  그분들은 잠시 망설이더니 결국 ‘어쨌든 다 정상은 아니잖아요?’ 라고 말했다. 물론 그들에게도 변태성욕자와 에이즈를 두려워하고 견제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 하지만 변태성욕과 에이즈 개념을 동성애에 연결시키고, 그것으로 다시 성소수자 전체를 비판하기에는 논리와 근거가 부족했다. 성소수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가장 강력하고 유명한 근거인 ‘동성애-항문성교-에이즈 프레임’은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봐도 남성 동성애자들과만 논의가 가능한 것이지 여성 동성애자와 그 외 다양한 성 정체성과 지향성을 가진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반대 논리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동성애 에이즈 프레임’을 제시하는 많은 사람들은 특정 전문가의 의견이나 관련 통계의 일부를 근거로 삼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많은 곳에서 활용(피켓, 책자, 영상 자료 등)되고 있었던 것은 역시 ‘에이즈 감염자의 대부분(92~4%)은 남성 동성애자 혹은 남성 동성애자의 대부분은 에이즈 감염자’ 라는 식의 주장이었다. 우리는 ‘동성애 에이즈 프레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질병관리본부,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에이즈학회, 그리고 공중보건 전문가들에게 동성애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쟁점들에 대한 공식 의견을 묻기로 했다.


  ‘에이즈 감염자 중 남성 동성간 성 접촉자 수가 많다’ 이것은 통계상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성 동성애자의 94%가 에이즈 감염자’ 라거나 ‘에이즈 감염자의 94%가 남성 동성애자’ 라는 식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질병관리본부가 제공한 통계를 정확히 다시 살펴보면


1. 2015년 기준 HIV/AIDS 내국인 10,502명. 그 중 남자 9,735명(92.7%)

2. 2015년 내국인 남자 신고현황

: 이성간 성접촉 336명, 동성간 성접촉 288명, 무응답 350명.


  에이즈의 특성상 무응답자 수가 많고 전수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통계만 가지고 동성애보다 이성애 혹은 이성애 보다 동성애가 에이즈와 관련이 있다고 결론짓기 어려웠다. 다만 남성 동성간 성접촉을 통해 감염되는 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고 동시에 이성간 성 접촉을 통해 에이즈에 감염된 수가 더 많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대한에이즈학회에서는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원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유는 동성애 자체가 HIV 바이러스를 생성하거나 전염시키는 것도 아니고,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이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 안전하지 않은 성관계가 에이즈 감염의 주원인이기 때문이었다. 또 다수의 전문가들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에이즈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동성, 이성 가릴 것 없이 콘돔을 사용한 안전한 성관계를 권장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도 동성애자들을 에이즈의 주원인으로 낙인찍고 적대시하는 것은 에이즈 관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했다. 에이즈 감염 예방과 관리를 위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에이즈가 더 이상 죽음의 병이 아닌 당뇨 같은 만성질환이기 때문에 이제는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혐오와 공포 그리고 낙인과 차별 자체도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동성애 에이즈 프레임’은 동성애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뿐만 아니라 에이즈 감염인들에 대한 구시대적 혐오를 동시에 유발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대형 교회를 포함하여 동성애에 대해 설교나 상담을 해준다는 곳들을 찾았다. 그곳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과 우려에 대한 상담도 들을 수 있었지만 주요 발언들은 충격적이었다.


“의사들도 동성애자들이 성소수자가 아니라 변태성욕자라고 말한다”

“동성애자들은 평균 수백 수천 명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동성애자들 몸에는 에이즈 균을 포함한 더러운 균들이 득실거린다”

“동성애는 치료받아야할 병이다”


  많은 상담/설교자들이 수십,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과학과 통계를 근거 삼고, 일부 전문가들의 권위에 기대 주장의 신뢰를 높이고 있었지만 대부분 사실과 매우 달랐다. 이렇게 ‘동성애 공포’가 과장되고 있는 현장은 주변 여기저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동성애는 병이고 치료가능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를 통해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고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라는 공식입장을 확인하였으나 방송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수 년 전에 논의가 끝난 주제라 굳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상황이라는 의견 때문이었다. 그러니 성소수자들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는 것 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폭력이었다.   


  물론 동성애나 성소수자들을 개인적으로 비판하거나 싫어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 그리고 종교적 신념으로 반대한다는 의견 역시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합리한 차별과 공공연한 혐오를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근거 삼아 무분별하게 공포를 확산 시킬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안전’도 ‘건강’도 아니다.


  방송이 나간 후 많은 비판이 있었다. 동성애를 조장하고 역으로 다수의 희생을 요구했다는 것. 하지만 이번 방송의 취지는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사실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동성애는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또는 조장되거나 억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와 다른 존재 그리고 나와 생각이 다른 대상에 대해 느껴지는 어색한 감정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들 간의 건강한 비판과 합리적인 논의는 다원화 사회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건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때문에 구성원간의 합리적인 비판은 차별금지법 앞에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지 합리적인 비판 자체를 금지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중심가에서 빨간 광고지를 나눠주던 배포자는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동성애자들을 차별할 수 없게 되니 그들을 막기 힘들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와 다른 존재에게 차별과 혐오를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소수가 다수가 되는 것을 억압하기 위해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을 수단으로 삼았던 시대를 지나 어렵게 오늘에 닿았다. 소수 혹은 다양성의 개념 자체가 억제될 수 있었던 사회가 다양한 소수들로 구성된 다채로운 사회로 진화한 것이다. 그것은 인류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또한 혐오와 차별을 수단으로 다수와 보편성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멀지 않은 역사를 통해 그 허구성과 폭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략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차별금지법 재정을 요구하는 동성애자 그리고 성소수자들. 그들은 특별한 지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또 대중 앞에 자극적으로 자신들을 드러내겠다는 것도 아니며 역으로 다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살자는 것. 불합리한 차별 없이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이다.


   방송을 한지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소수자 딸을 둔 어머님의 인터뷰가 잊히지 않는다. 성소수자의 부모만큼 당사자들의 건강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런 그들에게 어떤 근거로 치료와 반성을 강요할 수 있을까. 그리고 같은 반 동성 친구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는 아이에게 그것은 변태성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웃인 한 엄마와 딸은 무려 2017년이나 된 지금, 얼마나 더 잘 사냐의 문제가 아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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