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헬스라는 명상
현관문 도어락에서 약 달라는 소리가 난지, 방마다 멈춘 시계를 보고 지낸 지 몇 개월이 지났다. 미루고 미뤘던 일들이 쌓였다. 아침 화장실에서 나오며 기분이 좋아서였을까 오늘은 미룬 일들을 좀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 후 가장 큰 변화는 아침 화장실이다. 그렇게 매일 아침 시원하게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건지 잊고 있었다. 마음이 바쁘면 장부터 경직되는 몸인가 보다. 그 전의 내 장은 어떻게 버티고 있었던 걸까. 이제는 몇 개월째인 가벼운 아침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오늘은 무슨 변화가 일어난 건지, 할 일을 목록으로 적었다.
-멈춘 시계 약 주기, 현관문 도어락 건전지 교체하기, 운동화 빨기, 욕실 유리 닦기, 가스렌지 후드 닦기, 아이 장난감 중고거래 올리기, 헌옷 내기, 은행가기, 머리 자르기
운동을 하고 오면 자연스럽게 가정일에 소홀하게 됐다. 운동을 힘들게 하고 오면 겨우 점심을 해 먹고 쉬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가 아침에 운동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의 생활에 지장이 있으면 운동강도를 조정할테니 말하라고 했다.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지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집안꼴이 전과 같지 않았다. 애쓰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의도적인 ‘놓음’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죄책감과 중압감을 느끼기도 했다.
목록에 적힌 것 중 몇 가지를 오전에 처리하고 오후에는 미용실을 예약해서 머리도 자르러 갔다. 내가 가는 미용실은 부부가 운영한다. 남자원장님이 머리를 들춰보며 흰머리가 많다고 얘기했다. 흰머리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하얀색 머리카락을 보면 가끔 속이 상할 때도 있다. 갑자기 인생이 하얗게 느껴지게 하는 흰머리의 능력.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이렇게 빨리 늙을 줄 알았으면 어렸을 때 더 재밌게 놀 걸 그랬어요. 내 말을 듣고 남자 원장님이 여자원장님에게 물었다. 니도 옛날에 더 놀걸 후회하나? 두 사장님은 대화의 쿵짝이 잘 맞는다. 두 분이 물 만난 고기 마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 원장님은 하도 많이 놀아서 이제는 그런 생각이 안 든다, 남자 원장님은 자기는 지금 제일 잘생긴 것 같아서 예전이 안 그립다, 했다. 손님들과 나눈 이야기도 해주었다. 어려서 연애를 안 해보고 결혼해서 후회한다는 분의 얘기, 남편과 소통이 단절되어 살면서 외롭다던 분의 얘기 같은 걸 했다. 정작 말을 꺼낸 나는 내가 정확히 아쉬워하는 게 뭔지 모른채 두 사람의 말에 맞장구치며 앉아 있었다.
나와 나이가 같다는 여자원장님이 최근 한 손님에게 마흔줄 들어 사는 게 허무하다는 말을 했더니, 그 손님이 부자병이라고 했단다. 부자병은 사는데 걱정이 없어서 고민을 만들어서 하는 병이라고 한다. 주어진 삶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살라는 뜻이었겠지. 저도 부자병인가요? 하며 웃었다. 이름도 있어 보이는 부자병에 걸린 지 몇 년 째다. 최근 몇 개월간 가장 심하게 앓으며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변하거나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대로 운동하기, 글쓰기,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내 안의 당위 줄이기, 관계에 맞는 거리 설정하기, 종교 갖기, 같은 것들을 했다.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나는 충분히 움직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선택과 행동의 기준을 나로 두고 마음 속에서, 일상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연습을 했다. 이런 게 부자병이라면 병을 앓고 있는 내가 싫지 않다. 나의 모습을 찾으려 고민하는 내가 인간적이다. 밥 먹고 사는데 쓸모 있는 생각만 하고 사는 것이 인간은 아니지 않나.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자 그보다 높은 단계의 욕구를 추구하며 살아간 것이 인류의 발전에 기여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이 고민을 의심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보고 치열하게 뒹굴고 고민의 결과를 살아내고 싶다. 나중에 더 재밌게 살걸 후회하지 않도록.
이야기는 젊음으로 빛나지 않는 것이 아쉽다는 방향으로 흘렀다. 나올 때는 남자원장님이 파이팅! 이라고 하고, 여자원장님이 지금도 이뻐요, 라고 해준다. 나도 맞받아 파이팅, 하고 고맙습니다, 하며 미용실을 나왔다.
대학 다닐 때 교수님을 만나러 교수실에 가보면 문 앞에 재중, 부재중을 선택하는 팻말이 있었다. 교수님이 부재중일 때 찾아간 나는 당장에 나의 필요를 채우지 못해 조금 불편했다. 그 앞에서 발길을 돌렸던 장면은 떠오르지만 무슨 일로 갔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교수실 까지 찾아간 걸 보면 당시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이었을텐데 크게 곤란했던 기억이 없다. 결국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나보다.
누구도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있어야 자리를 지킬 때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다. 한동안 내 문 앞에는 부재중이 자주 붙어있었다. 할 일을 처리하는 오늘의 나는 문 앞에 재중을 붙여놓았다. 사소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된 건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준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