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근육이 준 자유
아버지 기일이 가까워왔다. 비행기를 끊어 놓고, 떠나는 당일 아침까지 짐도 싸지 않고 있었다. 급하게 가방을 싸고 집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집도 어지럽고 내 마음도 산만하고 짐 싸는 것도 귀찮았다. 음악을 들으면 마음 붙이고 앉아 짐을 쌀 수 있으려나. 나의 취향을 알아주는 음악스트리밍 어플이 추천해 주는 목록에 어반자카파의 <river>가 보였다. 가수의 목소리와 멜로디가 매력적인 곡이다. 한 곡을 무한반복으로 설정해 놓고 들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 좋은 누군가라도 흐르는 강물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는 평생 흐르는 강물을 붙잡으며 살아갈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 않고 그저 믿어주면 되죠.
아버지 기일 때문에 제주에 내려가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아버지의 부재라는 현실이 김해공항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새삼스레 현실로 다가왔다. 공항에 내려 짐을 부치고 비행기에 오르고, 40분 뒤 착륙을 기다리는 동안 새삼스런 현실이 더욱 성큼 가까이 다가와 이상한 기분이 들고 긴장이 됐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흐르는 강물을 붙잡는 것일까.
아버지 옆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간병하고 하는 동안 전에 없이 아버지와 가까이에 앉아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병원 밖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다. 목욕을 참 좋아하는데 항암 후반부터는 쓰러질까봐 걱정이 되어 목욕도 못 갔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목욕을 오랫동안 꼼꼼하게 하셨다. 주말이면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고 이발하고 오시는 날이 많았다. 말끔해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기분이 훨씬 좋아 보이셨다. 아버지는 목욕탕에 가서 있는 두 시간이 그렇게 즐거우셨다고 했다. 목욕을 해야 하니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런 마음인 줄은 몰랐다. 주말 아침 늦은 식사를 하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낮잠을 자고 텃밭을 돌보는 일이 아버지의 주말 낙이었다. 몸을 깨끗하게 하고 식물을 키우는 시간이 아버지에게는 생계를 잊고 자신을 돌보는 시간이었을 거다.
아버지는 말기 췌장암으로 투병하시다가 급성폐렴으로 입원하신 후 더 이상 어떤 치료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괴로워하는 아버지에게 주치의는 깊은 잠에 드는 주사 처방을 내렸다. 주사를 맞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 모두 아버지 곁에 섰다. 아버지는 식구들 각자에게 다른 말을 남겼다. 우리 부부에게는 서로를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건 어떤걸까. 그 순간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잠깐 되뇌이고는 잊고 지냈다. 와닿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난데없는 목표가 생긴 것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는 걸 1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곁을 지키는 동안 속으로 수없이 던졌던 질문, 사는게 뭘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을 마치 듣기라도 한 듯 답을 주셨는데 듣고도 듣지 못했다.
누르고 회피하던 허무감이 밀려오면서 놓치고 사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하던 날 밤, 그 순간을 눈썹을 뽑으며 맞이했었다. 눈썹은 다행히 완전히 뽑히지 않고 남았다. 눈썹 모양이 자리를 잡아 모양대로 조금씩 손을 본다. 어지러워진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전부를 밀어버리지 않았다. 내용의 일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공책 한 권을 모두 찢어서 버려버리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는 법을 찾았고,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 자체로 믿어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라면, 내가 전부임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오가며 내 삶은 나아간다. (인도의 구루, 니사르가닷타 마하라지)
그렇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목표에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사랑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삶을 흘러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