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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smiths Sep 26. 2016

아테네의 고민, 그 전략적 딜레마.

서구안보이론의 시작_무엇이 제국의 안보에 도움이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든 일어날 일이었다.


그리스 국가들은 당대의 초강대국 페르시아를 물리쳤다. 호랑이가 물러간 무주공산에 누가 왕이 될 것인가? 누가 그리스 반도와 에게해의 맹주가 될까? 그 자격을 갖춘 나라는 스파르타Sparta 와 아테네Athens 밖에 없었다.


본디 이 지역 전통의 패자는 군사강국 스파르타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급부상한다. 해군력에 우위가 있던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물러간 지중해로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해갔다. 아테네의 번영은 전통적 패자 스파르타에게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둘 간의 패권대결은 본디 일어날 일이었지만, 그 시작은 뜻밖의 장소에서 촉발되었다. 그 곳은 그리스의 작은 도시국가 에피담노스Epidamnos였다.



기원전 431년, 에피담노스에서는 치열한 국내정치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정치형태를 택할 것인가를 두고 민주정과 과두정을 주장하는 파로 나뉘었다. 그런데 이 정치라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잘 다스리는 것을 떠나버리고 정쟁자체의 승리에 몰입하게 되어버렸다. 두 정치세력의 다툼이 격렬해졌고, 민주파는 집권하자 아예 과두파를 추방해버린다. 추방되었던 과두파 역시 가만있지 않았다. 도시에서 추방된 마당에, 이민족을 끌여들여서라도 정권을 쟁취하고 했다. 결국 과두파는 그렇게 다시 정권을 쟁취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민주파가 가만있지 않았다. 에피담노스의 후견국인 케르키라Corcyra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의 과거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르키라는 과두정을 실시하는 나라였다. 그래서 민주파의 요청을 거절한다. 과두정은 고귀한 귀족들이 하는 정치였다. 어리석은 민중들이 주도하는 민주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자 민주파는 다른 도시국가를 찾아야했다. 민주파는 오라클에게 물었다. 신탁이 알려준 곳은 바로 코린트Corinth였다.


민주파는 코린트에게 도움을 청한다. 코린트는 이에 응하기로 하고,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코린트의 함대가 출격했다. 코린트의 함대가 에피담노스에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 반도(발칸반도)를 따라 케르키라의 옆을 지나가야했다. 코린트의 함대가 그곳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케르키라의 해군이 와서 코린트 해군을 기습했다. 습격을 받은 코린트의 함대는 궤멸했다.


케르키라의 기습. 케르키라는 왜 그랬을까? 케르키나의 의도는 이랬다. 에피담노스는 케르키라의 과거 식민지였다. 지금은 자치를 하지만 실질적으로 케르키라에 예속된 나라였다. 그 에피담노스에 다른 국가가 손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에피담노스에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이 케르키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럼 코린트는 왜 지원을 했을까? 그 역시 히스토리가 있었다. 사실 에피담노스는 원래 코린트가 건국한 식민 나라였다. 그래서 에피담노스에는 여전히 코린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과거의 후견국임을 내세워 다시 자신의 후견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한편, 에피담노스로 향하던 자신의 함대가 격파당하자, 코린트는 격노했다. 코린트는 당장 케르키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케르키라는 아테네, 코린트와 더불어 그리스 도시국가 중 3대 해상 강국이었다. 그러나 케르키라가 코린트와 전면전을 벌일 경우 서로 승산을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서 케르키라는 델로스 동맹의 형님인 아테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케르키라에게 복수를 벼루고 있던 코린트 역시 아테네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건 코린트와 케르키라와의 전쟁이니, 둘의 전쟁에 관여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한다.



Spartan pottery



아테네의 전략적 딜레마


아테네는 즉각 전략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케르키라는 자신이 이끄는 델로스 동맹국이지만 코린트와의 전쟁에 참여해달라는 요청에 응하기 곤란했다. 왜냐하면 코린트는, 스파르타가 이끄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소속국이었기 때문에 코린트와의 전쟁은 스파르타를 자극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리스 반도에는 두개의 거대한 힘의 균형이 있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 그 둘 사이에는 이미 긴장감이 있고, 긴장감이 고조되자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를 두려워했다. 두 강대국의 대결은 한쪽의 몰락을 건 건곤일척의 대회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둘은 평화조약을 맺기로 하였다.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에 간섭하지 않으며,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평화조약 때문에 아테네는 케르키라를 선뜻 지원하기를 꺼렸다. 만약 여기서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지원을 거절하였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고 케르키라-코린트의 국지전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아테네가 케르키라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당시 그리스 반도에서 해군력이 가장 강력한 국가는 아테네, 코린트, 케르키라였다. 그 중 케르키라가 코린트에 함락되어 펠로폰네소스 동맹으로 편입된다면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는 해군력에서 절대적 열세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세력균형을 일시에 무너뜨려 아테네의 안보에 거대한 위험이 된다. 게다가, 케르키라는 펠로폰네소스를 견제하기 좋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케르키라를 잃어버린다면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더욱더 견제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이 깊을 무렵, 망설이는 아테네의 태도에 낌새를 느낀 케르키라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낸다.

'만약 우리를 방치한다면, 아테네는 저희 해군과 펠로폰네소스 해군의 연합함대를 상대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우리 해군과 함께 펠로폰네소스 해군과 싸우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당신은 침략자를 돕는 것이 아니고 침략의 희생자를 돕는 것이다.' 라고 참전의 실리와 명분에 대해서 모두 언급했다.


아테네는 고민이 깊어졌다. 군대를 보내 코린트를 공격하는 것은 스파르타를 자극하는 일이고 이는 확전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올 수도 있는 큰 결정이다. 물론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누르게 된다면, 천하패권을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건곤일척의 전쟁이 두렵기는 스파르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게 참전을 자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라는 서신을 보낸다. 만약 아테네가 개입한다면 스파르타는 코린트를 위해 개입해야할 것이고 이것은 세계대전을 의미했다. 이것은 스파르타에게도 두려운 시나리오였다.

역으로 스파르타가 조약을 파기하고 코린트를 도와 케르키라를 선점한다면 어떻게 될까? 참여하지 말라는 스파르타의 서신은 속임수인가, 아니면 약속을 지키라는 충고인가? 아테네는 점점 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아테네로서는 어떤 전략적 결정을 내려야 할까?


Acropolis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기존 패권국을 불안하게 한다.


"아테네가 제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은 옳고도 정당한 것입니다. 제국은 독제자와 같습니다. 제국을 가지는 길이 잘못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합니다."  

아테네의 주전파 페리클레스는 동료 시민들에게 이러한 주장을 피력했다.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아테네의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딜레마에 빠져있던 아테네는 결국, 명분과 실리를 모얻고자 다음과 같은 작전을 정하고 참전을 결정한다. 케르키라를 돕기로 하지만 억지력(deterrance)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으로 약간의 함대를 파견하되, 전투에 직접 개입하지 말라라고 한다. 아테네 군의 개입이라는 사실만으로 코린트의 침공을 억지키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테네는 스스로 임계철선臨界鐵線이 되고자 했다.


마침내, 복수의 칼은 간 코린트 해군은 주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150척의 대규모 함대를 케르키라 앞으로 보낸다. 케르키라도 140척의 함대를 대응하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뒤에는 아테니의 함대 10척이 깃발을 펄럭이고 있었다. 아테네는 혹시나 모를 전투를 대비하여 그 뒤에 또다른 10척의 예비대도 준비해두었다.

그러나 코린토는 아테네가 참전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참전을 알지 못했다. 분노에 찬 코린토는 케르키라를 맹렬히 공격했다. 케르키라가 수세에 몰리자 아테네 함대는 조금 가담을 한다. 그러나 전쟁의 열기는 본인들의 의지보다 훨씬 깊게 개입을 야기했다. 전투가 격렬해지자 아테네는 예비대마저 투입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아테네는 생각보다 많이 개입하게 되었고, 아테네의 확실한 개입으로 코린트는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사태로 코린트는 아테네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펠로폰네소스의 주요 동맹국인 코린트와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휘말린 감이 없지 않은 아테네는 코린트가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가장 예상가능한 코린트의 전략적 행보는, 지정학적 요충지이자, 아테네의 동맹도시지만 동시에 코린트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포티다에아Potidaea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아테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대비를 하고 있었지만 결국 포티다에아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코린트의 수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코린트는 포티다에아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책략한다. 포티다에아에게는 반란을 일으키면 코린트가 돕기로 약조했다. 아테네가 나설 경우, 스파르타가 지원해줄 것임을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시에, 코린트는 아테네와의 전쟁을 위해 펠로폰네소스의 맹주이신 스파르타를 자극한다. 그동안 아테네가 거대해지는 것을 왜 막지 못하고 방임하느냐고 다그쳐왔다.

스파르타도 고민에 빠지게 된다. 새롭게 부상하는 아테네의 힘을 제압하지 못하면 그리스 전체가 아테네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미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직후부터 있어왔었다. 새로운 세력의 부상은 기존 패권국을 불안하게 한다. 스파르타는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코린트에게 파병을 약속했다. 세력균형이 무너지고 아테네가 이끄는 질서에서는 스파르타의 안보는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포티다에아에 파병을 하면 스파르타 역시 파병하기로 코린트에 약속했다.


마침내 포티다에아의 반란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포티다에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약속대로 코린트는 중무장 부대를 보내 반란군을 지원한다. 코린트는 이렇게 해서라도 아테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아테네 역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한다. 아테네는 코린트도 코린트지만 그 뒤의 스파르타의 개입이 두려웠다. 그렇다고 자신의 식민국에서 코린트가 사주하여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침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참전하지 말 것을 요청한다. 스파르타 역시 아테네에게 포티다에아의 개입 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둘다 상대를 향해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렇게 그리스반도는 두 강대국의 전쟁에 휩쌓이게 되고, 누구보다 우수한 정치제도와 도시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이 대단했던 아테네는 결국,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에게 평화를 간청하였고, 스파르타는 화평의 댓가로 아테네를 둘러싼 성벽을 허물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도시 아테네를 둘러싸고 있던 성벽이 무너지자 아테네의 패권도 동시에 무너졌다.


*덧,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이기기 위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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