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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스타 Jan 18. 2023

거기에 아이가 있어요

<고양이와 쥐, 귄터 그라스>



시립도서관 800번대를 얼쩡거리다가 집어 든,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중 '고양이와 쥐'. 작고 얇은 두께의 책이다. 예전에 읽은 유대인 생존자를 소재로 한 만화 '쥐'가 떠올랐다. 서양인들에게 쥐나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우리랑은 많이 다른 듯하다.


<쥐, 아트 슈피겔만>


유대인 생존자 얘기를 했듯, 이 책은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군인들이 나라를 떠나 전 세계에 파견되고, 비행기가 낮게 날며 건물을 폭격하며, 제법 자란 아이들이 총을 들어야 했던 세상.


작가의 고향 도시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특수성을 띠는 장소다. 단치히는 지금의 폴란드 그단스크로, 중요한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일에 속했으나 독일의 패전으로 체결된 베르사유조약에 의해 양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시가 되었다. 당시 단치히 인구의 대다수는 독일인들이었고, 독일 땅이 아니었기에 점령의 형태로 나치의 영향권 아래 편입되기는 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주민의 과반수가 나치를 지지하고 있었다. 단치히는 큰 저항 없이 나치 이데올로기를 체화했다.
                                                                                                             
-출판사 서평 중


배경은 '단치히'라는 곳이다. 어른이 된 필렌츠라는 남자가 10대 시절의 동급생들을, 특히 '말케'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과거를 회상한다. 항구에는 침몰한 군함이 있고 단치히의 가정에서 많은 성인 남자들이 전쟁에 징집되어 사라진 도시. 필렌츠의 형도 러시아 전선에서 사망한다. 필렌츠 가정은 그로 인해 특별 대우를 받는다. 가끔 학교에는 모교 출신 전쟁영웅이 방문해 연설을 한다. 아이들은 독일이나 일본의 군함이나 전투기 종류를 포켓몬 외우듯 줄줄 외운다. 2020년대 아이들이 포켓몬 스티커를 모으듯 1930~40년의 단치히 아이들은 나치 전쟁영웅의 사진을 모은다. 성인 남성이 없는 도시에서 혼자서 어른이 되어가는 소년들. 여름이면 바다 밑으로 잠수하며 침몰한 군함으로 들어가 잡동사니들을 수집하며 텅 빈 유년기를 채운다.


말케는 몸이 약하고 울대뼈가 유난히 툭 불거진 아이이다. (나는 티모시 샬라메를 떠올리며 읽었다.) 그는 뭔가 달랐다. 어머니, 이모와 사는 말케. 그는 아이에서 청년이 되면서 악바리 같은 '기질'을 드러낸다. 수영과 잠수를 누구보다 잘 하며, 성적도 꽤 좋다. 아이들이 전쟁영웅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낼 때도 혼자 손뼉을 치지 않는다. 그는 성모 마리아 상을 목에 걸고 다니거나, 마리아 상에게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


요즘은 기억에도 거의 없던 형이 가끔 그리워질 때가 있으나, 그 당시 나는 오히려 제단을 질투했다. 그런 검은색 액자 틀 안에 확대된 내 사진이 들어있는 상상을 했고, 소외감을 느꼈다.


전쟁에서 사망한 필렌츠의 형은 집 안에 제단으로 남았다. 말케도, 필렌츠도, 단치히의 많은 아이들은 부성이 부재된 세계에서 살았다. 그들의 끓어넘치는 치기를 견제해 줄 힘이 없었다.


"야, 너희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겠다."


죽은 자에게는 훈장이 주어진다. 죽기 위해 사는 것 같은 삶. 그리고 누군가를 죽여야 했던 삶.



말케가 속히 학교에서의 씁쓸한 추억들을 잊었으면 한다. 곧 호르스트 베셀 실업고등학교에서 개최될 강연을 경청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영웅답게 연설보다 훌륭한 침묵을 택하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말케는 학교에 강연 왔던 해군 대위의 무공훈장을 훔치게 된다. 모두 말케를 속으로 의심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다. 떠밀려 의심받은 부슈만은 따귀를 여러 차례 맞아야 했다. 필렌츠의 고백으로 인해 말케는 퇴학을 당하게 된다. 다시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온 말케는 꼭 퇴학당했던 그곳에서 연설을 하고 싶어 하지만, 대위의 무공훈장을 훔쳤던 그 사건으로 인해 연설도 불발된다.



흔히 '완벽한 피해자'는 없다고 한다. 나치에 동조했던 지역인, 단치히의 아이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가해자'는 아니었다. 그들도 결핍과 상처가 가득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은 고양이였다. 그들은 무심한 관찰자였다. 궤멸해야 할 적과 그들을 무찌르는 영웅들로 나누어진 세상에서 영웅이 되기로 선택한, 고양이와 쥐의 역할만 있는 세상에서 고양이가 되기로 한 것이다. 러시아 전차를 무수며 도스토옙스키를 읽던 말케는, 단순무식하고 거친 보통의 소년들과는 좀 달랐기에 그 길고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완벽한 가해자가 되지 않고서는, 건너올 수 없던 그 동굴을.



직접적인 전쟁 피해를 겪었던, 순전히 당할 수밖에 없던 나라의 사람들에 비해 물론 그들은 굉장히 잘 먹고 잘 살았고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가해자이다. 그러나 그 또한 국민들의 유년기를, 아이다움을 빨아먹고 일궈낸 것이었다. 미약한 소년은 거대한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지만, 어른들은 최대한 그들을 지켜줘야 한다. 책을 읽는 내내 왜 우리를 아이로 자라게 하지 못하게 했냐는, 어른들에 대한 질문이 들리는 듯했다.



            

https://www.ytn.co.kr/_ln/0104_201807112249420254


최근 몇 년간 우리가 아이들에게 했던 무책임한 행동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태국에서 동굴에 갇혔던 아이들을 구했던 어른들을 떠올린다. 생명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아이들은 '돌봄'받을 수 있었다. 동굴에서 마지막에 나오며 아이들을 끝까지 지켜낸 코치, 그들을 살리기 위해 차분히 대처한 정부, 직접 들어가 구조되는 아이들의 곁에 있던 의사. 우리에게는 뭐가 없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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