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부부, 그들의 사는 이야기(09)
시연이 아빠 발 사이즈가 270인데
안 신는 신발 있으면 주세요~
올케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텅 빈 신발장만 남았습니다.
그게 싫었나구요?
그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던지...
모처럼 집으로 찾아온 동생네와 고기를 구워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전기 기술자인 동생은 현장이 부산으로 이동한다며
앞으로 몇 달간은 부산 아파트 공사 현장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인사도 할 겸 자주 못 보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찾아온 날이었습니다.
가끔 남편의 술친구가 되어주던 동생,
체구가 비슷한 두 사람은 친형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았습니다
큰 키와 제법 나가는 덩치,
그리고 살짝 깍두기 형님들 스타일까지.
못내 보내기 서운했던 남편은
동생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고 선심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작업복 말고 입을 수 있는 옷가지를 달라고 하더군요
남편은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옷장을 활짝 열어젖혔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거 입어봐!
오, 잘 어울리는데!
이것도!
동생은 그런 형의 추임새에 기분을 맞추려는 듯
꺼내 주는 옷을 다 입어보고
한 바퀴 돌면서 자신의 스타일과 견주기도 했습니다.
패션쇼 무대를 떠올릴 뻔(?) 했습니다.
ㅋㅋㅋ
그렇게 남편은 동생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면서
아예 겨울 모피까지 덥석! 안겨주었습니다.
겨울 점퍼, 여름 바지와 티셔츠. 정장, 허리띠....
자신은 이제 필요 없다며 아낌없이 동생에게 내주었는데
은근히 텅 비어 가는 옷장을 바라보는 눈길이 매우 흐뭇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유~!
이제 괜찮아요~
시연 아빠가 이런 색은 잘 어울리지 않아요
분홍색 바지를 어떻게 입어요~
왜?
형이 입을 수 있으면 나도 입어!
나도 은근히 색깔 있는 남자란 말야!
남편이 즐겨 입던 분홍색 바지와 빨간색 바지를 입어보더니
동생은 바지를 벗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지 색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올케는 한소리를 하며 냉큼 벗어놓길 바라는 눈치였어요
그 바지요?
결국 부산에 가서 잘 입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거! 우리 형이 준거야!
좀 멋지지 않아??
그렇게 있는 옷, 없는 옷 다 줘버린 남편은 개운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올케가 던진 한마디!
그러고 보니 신발이 빠졌네요!
신발만 있으면 완벽한데요!
헛!!!
여기까지 생각할 줄이야...
결국, 우리는 옷장에 이어 신발장을 개봉했고
그동안 가지런히 신발장에 갇혀 지내던 6켤레의 신발을 동생네에게 내주어야 했습니다.
어머!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해 본 것뿐인데
이렇게 발 사이즈가 꼭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정말, 그냥 한 번 해 본 소린데...
ㅎㅎㅎ
그렇습니다.
정말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인데...
우리 집은 그날 옷장과 신발장을 다 털렸습니다.
동생네가 가져갈 짐을 담기 위해
아예 캐리어까지 꺼내 주어야 했습니다.
그 많은 옷가지를 담을 것이 필요했으니까요.
올케가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캐리어를 부산에 내려가는 짐가방으로 사용하고 싶지 않다며
동생과 옥신각신하는 것을 들은 터였습니다
에휴..
그래..
캐리어도 선물이닷!!
그렇게 동생네가 집으로 돌아간 후
마치 허리케인이라도 왔다간 것 같은 시원함이 몰려왔습니다.
거센 바람이 한차례 불고 지나간 자리에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한결 가벼워진 옷장과 신발장을 보면서
왠지 마음도 가벼워진 것을 느꼈습니다.
입지도 않으면서 언젠가 꼭 입을 거라는 생각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저와는 달리
입지 않을 거라면 바로바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남편.
꽉 들어찬 저의 옷장은 아직도 비워지길 바라는 옷들로 가득 차 있지만
남편의 옷장은 공간의 여유가 많고 정리도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지 느끼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
꼭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통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행복이 더 큰 것이었습니다.
행복이란 움켜쥐는 게 아니라
손을 폈을 때 밀려오는 따스한 봄바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움켜쥔 손으로는 잔뜩 힘만 들어갈 뿐.
따스한 바람이 주는 감촉과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손을 펴야 합니다.
우리는 그때
보이지 않는 바람을 느낄 수 있고
행복이 주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따스한 봄바람입니다
움켜쥔 손을 풀고
손가락 사이로 불어 드는 부드러운 바람의 감촉을 느껴보세요
바람을 타고 흐르는 자유와 풍요로움이 온몸으로 밀려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