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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Dec 05. 2019

아버지의 뇌출혈, 전조증상

내 남자 이야기(40)

https://brunch.co.kr/@goldstar10041/51


2000년 1월.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 해. 세상은 금새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위기감과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밀려올 거라는 희망이 뒤섞여 혼란스럽고 떠들썩했던 연말과는 달리 조용하기만 했다.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늘 똑같은 일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에게도 그렇게 새해가 밝아 왔다. 그러나 1월의 추위는 너무 사납고 매섭기만 했다.


그날도 나는 다른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에 집을 나서기 위해 씻는 둥 마는 둥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었다. IMF로 사업을 정리하면서 생활비를 대지 못하고 있어 괜히 마음이 부담스럽고 죄스러워 새벽에 길을 나선 지도 벌써 1년째였다.


새벽 6시쯤. 집을 막 나서려는 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받는 소리에 식구들과 마주칠까 봐 그냥 현관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다. 누구라도 마주친다면 늘 반복해서 떠들어대는 뻔한 소리를 듣는 것이 귀찮았다. 뭐하고 다니는 거냐. 밥은 먹고 다니냐. 회사는 어떻게 됐냐. 또 망한 거냐. 돈은 벌고 있는 거냐.. 등등. 그런 잡생각을 하며 대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대문이 열리고 엄마가 뛰어들어 오시며 큰소리를 치셨다.

"둘째야! 어디 가냐! 지금 큰일 났다. 니 아빠가 쓰러지셔서 아파트에 앉아있다고 급하게 연락이 왔다. 빨리 가서 모셔와라!"

"나 지금 나가야 돼요."

"이런 때려죽일 놈의 새끼! 빨리 갔다 와! 갈 사람이 아무도 없어. 모셔다 놓고 나가!"


온 동네 새벽잠을 깨우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어쩔 수 없이 대문을 나서며 털래털래 걸어갔다.

"에이씨. 왜 맨날 이런 일은 나만 시키는 거야? 아빠 모시고 오면 온 집안 식구랑 동네 사람들 다 일어나서 기다릴 텐데. 아 짜증 나."


아직 날이 밝지 않아 어두운 길을 따라 내려간 곳은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하고 계신 아파트였다. 정년 퇴임 후 당신의 용돈이라도 벌겠다며 경비일을 시작하셨는데 IMF로 힘든 상황에 조금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우셔서 얻은 일자리였다. 아버지는 경비일로 급격히 건강이 나빠져 세 번이나 쓰러질 위기를 넘기셨다. 우리 집의 가족력인 고혈압으로 인한 지병. 엄마가 뇌출혈로 대수술을 받으신 이후 늘 모든 관심이 아버지 건강으로 초점이 옮겨졌는데 역시나 초기 뇌출혈 증세를 보이셨다. 다행히 약물 치료로 회복 중이셨다.


나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경비실을 찾아갔다. 동료 경비아저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반기며 안부를 물어왔다.

"둘째. 또 너구나. 어째 일은 잘되냐? 나라가 망쪼드니 젊은 니들이 고생하는구나. 니 아부지가 늘 니 걱정하더라."

"아빠는 어디 계세요?"

"그게. 순찰 돌다가 계단에서 굴렀는데 동네 사람들 보면 민원 들어온다고 아파트 뒤편에 앉아계셔. 빨리 가봐. 그 정신에도 잘릴까 봐 걱정하더라. 이 짓도 이제 못해먹을 판이여.."



입이 열개, 천 개라도 할 말 없는 나는 아버지가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파트 뒷마당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따라 더 왜소해 보이는 등판을 보자 한숨과 짜증이 동시에 올라왔다.

"아빠! 뭐 하세요! 이 흙먼지는 또 뭐고. 그냥 경비실에 계시지 뭐하러 이렇게 추운데 밖에 계세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라고요. 아휴. 잠바는 어디다 두고 얇은 경비복만 입고 있는지... 네???"


나는 아버지의 초라한 행색에 너무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입주민들 들을라. 주민회에서 출퇴근 시간에는 복장을 단정히 하라고 해서... 그랬다.."

"알았어요. 집에 가요. 일어나세요. 걸을만해요? 택시 잡을까요?"

"아니다. 괜찮아. 니가 좀 부축해 주면 돼지..."


아빠의 오른팔을 내 어깨 위에 올리고 나는 허리를 부축해 집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빠.. "

"응.."

"할아버지도 10년이 넘도록 내가 부축하고 업어서 집으로 모시고 갔는데... 제가 아빠를 벌써 몇 번째 부축하고 가는지 아세요?"

"그래. 니가 고생 많았지. 그래도 아빠는 술 먹고 그런 것이 아니잖어."

나는 걸어가는 동안 속이 상해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배는 남산처럼 불룩한데 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아빠의 체구, 그리고 옆구리는 뼈만 잡혔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바라보았던 아빠의 뒷모습은 거대한 산 같았다. 아빠는 손재주가 좋아 고장 나거나 부러진 것을 새로운 것으로 고쳐 놓았다. 언제 고장 났냐는 듯. 언제 깨졌냐는 듯. 손재주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아빠는 신기한 마술사 같았다. 나는 그런 아빠가 좋았다.


아빠는 집으로 향하며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근데... 나까소네 수상이 왜 우리나라한테 뭐라고 하고 지랄이냐. 일본 것들은 높으나 낮으나 하는 짓들이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겄다."

"네? 왠 나까소네요..? 언제 적 말씀을 하세요?"

아빠는 80년대 중반에 일본 수상을 했던 나까소네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아빠.. 지금 정신 말짱하죠?"

"그럼.. 멀쩡하지. 왜 그렇게 보냐?"

넘어지며 까진 상처.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동자를 살폈다. 초점이 확실한 것이 괜찮아 보였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그렇게 아버지를 부축해 오른 새벽길. 집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소란스러움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듯했다. 그도그럴것이 한동네에 30년이 넘도록 제일 큰형님으로 살면서 없는 형편에도 이웃지간에 돕고 살아야 한다며 나누고 베푸는 것이 일이셨던 아버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지하에 세들어 살던 노부부에게 쌀 한가마니를 몰래 가져다 주려다 어두운 계단에서 굴러 병원신세를 지셨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덕분에 동네 사람들은 아버지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버지를 안방에 눕혀드리고 출근하겠다며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

"나.. 똥 매렵다.."

그리고 화장실로 다급하게 들어가셨던 아버지가 1분도 안돼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나오셨다.

"아니~ 이 양반이~ 뭔 화장실을 그렇게 갔다 와요?"

"똥은요...?"

"안 나와..."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벌겋게 상기된 아버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혹시나 바지에 지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직접 손을 넣어 엉덩이를 만졌다. 항문이 말라 있었다. 이상했다.

"정말 괜찮아요? "
"응. 이제 괜찮아. 나 때문에 늦겠다. 어서 출근해라."



그렇게 소란스러운 아침을 맞으며 대문을 나섰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내가 너무 심리적으로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부러 외면하며 출근을 했다. 그날은 새로운 아이템을 찾기 위해 강남 코엑스 중소기업 전시관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었다.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시달린 후 도착한 전시관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눈여겨보았던 제품에 대해 상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서 계속 삐삐가 울려댔다.

삐삐!! 828282828...


"무슨 일인데요.. 바쁜데 뭘 그렇게 자꾸 삐삐를 치고 그래요. 한 번 하면 되지.."

"둘째야. 니 아빠가 좀 이상하다. 눈은 떴는데 의식이 없다. 아까 너 나간 뒤로 계속 구역질하고 정신없다고 하고. 그러더니... 어떡하냐.. 빨리 와 봐!!"

"엄마! 나 지금 차도 안 가지고 왔거든요. 우선 119 눌러서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세요! 나도 거기로 바로 갈 테니까요!"


응급실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아침에 아빠가 했던 행동들을 복기했다. 분명 무언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생각이 미치자 조급한 마음에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깍지를 낀 두 손에 힘이 들어가며 식은땀이 났다.

"뭔가 이상했는데. 그때 바로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 별일 아니겠지... 뭔가 전조증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설마..?"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응급실로 뛰어갔다. 응급실 한편, 아빠가 누워계신 침대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검사를 해야 할 의사가 보이지 않았다. 그 곁에서 엄마는 한숨만 쉬고 아무 말이 없었다. 여동생이 상황 설명을 했다.

"뇌출혈인데 피가 안 멈춰서 수술을 못한대. 일단 피가 빨리 멈춰야 하는데... 그것도 늦게 멈추면 소용없대. "


머리 양 옆 관자놀이에 호스가 꽂혀 있고 피가 흘러나와 링거병에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피가 머리에 고여있지 않고 쏟아져 나와 뇌압이 떨어져 살짝 의식이 돌아왔다. 아빠는 누워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고는 눈동자를 떨며 뭔가 말을 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웬일인지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계셨다. 그저 누군가를 찾는 듯. 뭔가 하고픈 말이 있는 듯 눈물이 살짝 고인 눈동자만 상하좌우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신경외과 담당의사와 상담을 했다. 형광 보드판에 붙여진 CT 촬영 사진을 보며 긴 설명을 이어갔다.

"심한 뇌출혈로 뇌가 많이 손상된 상태입니다. 피가 언제 멈출지 그것이 문제인데 당장 수술이 어렵습니다. 상태를 지켜보겠지만 장기적으로 병원에 계실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뇌출혈이 있을만한 전조 증상이 있었을 텐데 기억나는 것 없으신가요?"


나는 그냥 말없이 방을 나왔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왜 전조 증상이 없었겠는가. 아파트 계단에서 굴렀을 때 이미 살짝 출혈이 생겼고, 집에서 화장실 들어가서 얼굴이 붉어지도록 힘을 주었을 때 이미 큰 출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도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럽다고 하시며 헛구역질을 계속하셨다고 하는데... 그때 이미 골든타임을 넘어가고 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내 책임 같았다. 그때 바로 병원으로 모시고 갔어야 했는데....


....................


그렇게 가족의 무지함 때문에 그리고 나의 외면 때문에 삶의 끈이 희미해진 채 누워 계셔야만 하는 아버지와 나의 긴 병상 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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