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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an 15. 2020

음주 운전, 우리 같은 일하는 사람이구만~

내 남자 이야기(47)

1997년 초겨울, IMF가 시작되던 한 해는 한보 철강 사태 이후 삼미그룹, 한보그룹, 진로그룹 등 줄줄이 무너져 내렸고 미친 듯 치솟는 달러값으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힘든 시절이었다.


그래도 1년 전부터 마음 맞는 이들과 자금을 모아 작게 시작한 의료기 수입사업이 그나마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하루도 쉬지 못하고 지방 출장을 다니며 영업사원 교육과 매출 카드 전표 수금을 하느라 정말 바쁜 시간을 보내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나게 된 여자 친구로부터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 집안의 반대도 심했을뿐더러 바쁜 와중에 만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보다 일곱 살 어린 친구라 세대차이를 느끼며 항상 기분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서구적인 외모에 말수가 적어 마음을 많이 두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설득하기 위해 시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오후 4시부터 자주 갔던 잠실 신천역 근처 해물탕 집을 찾았다. 해물탕이 나오기도 전에 소주 한 병을 비웠다.


"오늘 무리하는 거 아닌가? 무슨 날 잡은 것도 아니고... 천천히 마시지.."

"아니요. 어차피 마음먹은 거. 오늘 정리하기 쉽게 술이나 실컷 마실래요."


평소 말이 없고 애교도 없이 무표정하게 묻는 말에 짧은 대답만 하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녀가 그날따라 시작부터 웬일인지 말을 많이 했다.


"말없이 시크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인데~ 오늘 하루치 매력을 다 발산하는 느낌인데?"

"**씨. 나, 원래 말을 잘할 줄 몰라서 빙빙 돌려 못하니까 딱 한마디만 할게요. 헤어집시다. 바빠서 전화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무슨 연애질 한다고... 그냥 잘하는 일이나 하세요..."



그녀의 말투에는 빈정거림이 섞여있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말에 설득을 당할지도 모른다며 아예 아무 말도 듣지 않겠다며 연신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 3잔이 고작이던 사람이 한 병을 마시더니 혀가 꼬이고 얼굴은 취기가 오를 대로 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는 나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면서도 복잡한 마음을 내려놓았다.

'애라 모르겠다. 술이나 마시자! 그래~ 먹고 헤어지던지 뒈져 버리던지... 해보자...'

"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이랑 맥주 3병 더 주세요~!!"


그렇게 시작된 소주와 맥주는 두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고 이미 취할 대로 취한 그녀는 한쪽에 쭉~ 뻗어 잠이 들었다. 안주 없이 소주만 먹는 나는 벌써 소주 6병과 맥주 8병을 마신 탓에, 쓰러져 잠든 그녀를 앞에 두고 주저리주저리 헤어지면 안 되는 이유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어 계산을 하고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나도 운전석에 앉았다.


"아구~ 운전하시려고요~ 안돼요~ 술이 많이 취했는데..."

"아니요~ 차에서 잘 겁니다.. 사장님 가게 앞이니까 괜찮죠?? "

 

운전석 의자를 젖히고 잠이 들었다. 조수석에 누운 그녀는 코까지 골았다.





그리고 얼마나 잤을까...?

나는 뭔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잠결에 눈을 떴다.


헉!! 이럴 수가!!!


나는 달리는 차에 앉아 운전을 하고 있었다. 잠실 사거리를 지나 석촌호수 방향으로 들어서며 교차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직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 이런 낭패가 있나...'


잠시 조금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잠을 자다가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일어나서 볼 일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나온 것이 생각났다. 흐헛!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걱정과는 달리 이미 사태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곧 알게 되었다.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광경은 가관이 아니었다.


윙~~~ 윙~~~ 윙~~~

"서울 ** 8*** 차량!!! 앞에 정차하세요!!"


경찰차가 뒤따라 오며 차를 세우라고 스피커로 외치고 있었다. 거기에 경찰 싸이카 세 대까지 뒤따르고 있었다.

"큰일이다.. 근데.. 무슨 요인 경호도 아니고 세 대씩이나 쫒아오냐... 아~ 술냄새 엄청나는데... 어떡하냐.. 에라 모르겠다. 일단 튀고 보자.. "



나는 번잡한 시내를 빠져나와 밀집한 주택가로 달렸다. 영화 속 한 장면도 아니고... 뒤에서는 경찰차가 쫒고 앞에서는 도망가고 결국 골목길에서 경찰차를 따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가 제일 혼잡한 틈으로 주차를 하고 시트를 뒤로 젖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잠든 척했다. 그러나 십여분 후.


똑. 똑. 똑.


"아저씨. 자는 척하지 말고 문 여세요. 자꾸 이러시면 공무집행 방해도 추가됩니다."

역시 못 들은 척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찾았지? '


"숨으면 못 찾을까 봐요? 내리세요!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그때...

"뭐야~! 어.. 니들.. 죽을래!! 뭐 하는 거야!!"

아.. 놔.... 옆에서 곤하게 잘 주무시던 여자 친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잠꼬대를 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옆에 있는 사람도 깼는데 장난 그만하시고 문 여시죠~"

'아... 정말 미치겠네.. 큰일이다. 내일 할 일이 태산인데...'


그렇게 나와 여자 친구는 수서경찰서로 곧바로 연행되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경찰 뒷문은 안에서 안 열린다는 것을. 잠든 여친을 둘러업고 경찰서로 입성하는 내 모습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술이 확 깨기 시작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여친을 긴 벤치에 눕히고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정신 나요? 여기 지장 찍으세요! 아저씨 음주운전이라고! 112 신고 들어온 것만 세 건이야!!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겁니까? 그 여자분은 또 누구예요? 사고 없이 왔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거.. 젊은 사람이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이게 무슨 창피입니까? "


이미 준비해 두었는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순경이 설명도 없이 불숙 내미는 조서는 내 눈을 더욱 깜깜하게 했다.


"박순경. 빨리 지장 찍게 해서 유치장에 넣어.. 여자는 신원 조회해서 집으로 연락하고.."


가뜩이나 집에서 반대하는 만남인데 이런 사단으로 집까지 연락이 간다면 확실히 끝이 나는 거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다. 그때 나는 조서를 읽고 그대로 던지듯 거칠게 책상 위로 내려놨다.


"난 이 조서 인정 못합니다! 무슨 죄목이 일곱 가지나 됩니까? 음주 운전한 것도 인정할까 말까 한데.. 지금 장난합니까? 젊은 사람 인생 망칠 일 있어요? 난 지장 못 찍으니까 그런 줄 알고 상급기관으로 빨리 넘어갑시다!"

"이 사람이 지금 죄짓고 경찰서 와서 무슨 행패야! 장난? 장난은 지금 당신이 하고 있잖아! 여기서 지장을 찍고 인정해야 당신 말처럼 상급 기관으로 넘어갈 거 아니야!"

"됐구요.. 전 인정 못 합니다. 그런 줄 아세요!"


그리고 팔짱을 낀 채로 잠을 청했다. 혹시 내 손을 강제로 끌어다 지장을 찍을까 봐 손은 주먹을 꽉 쥔 상태로.


"이봐.. 당신 직업이 뭐야? "

난 곰곰이 생각하다 모른 척 눈을 감고 대답했다.

"목수요."
"이 사람이... 진짜 장난하나.. 목수는 아무 나하는 줄 알아?"



그렇게 진짜로 잠이 든 채 새벽 추위에 눈을 떴다. 여친은 언제부터인가 내 허벅지에 머리를 베고 겉옷을 덮고 아주 편안하게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저 친구 아지고 자나? 아주 안방이구만. 넉살이 좋은거야? 집안 빽이 좋은거야? 좀 깨워봐! "

"놔둬..  이따 내가 정리할테니까 모두들 순찰이나 나가봐..."

"충성! 다녀 오겠습니다.!"


새벽 순찰을 돌기 위해 자리를 비운 경찰서는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당직 경관 중 계급이 높은 듯한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봐요. 젊은이. 눈 떠봐. 잠 깼잖아. 세상 일도 충분히 알만한 사람인 것 같은데 얘기 좀 하지.. 자네 직업이 뭔가?"

"목수요"

"뭐.. 허... 나 참.. 자네 손바닥 좀 보여주게..."

나는 오른손을 펴 보였다.

"그게 목수 손이야? 우리 아버님이 50년 동안 목수로 일하셔서 내가 목수 손을 좀 알거든. 자네 손은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던 손이야... 그만 말장난하고 진짜 직업이 뭐야...?"


생각을 잘해야 했다. 그 순간 식품 유통일을 할 때 마지막으로 함께 일했던 직원이 생각났다. 그는 그 당시 **정당 지역 지구당 위원장 사무실에서 지역 활성화 청년부장으로 일하며 차기 국회의원 후보를 보좌하는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촉망받는 야당인사인만큼 그를 팔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 직업을 쉽게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서로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 있거든요. 그냥. 상급기관에 넘기시는 게..."

"어... 그게 무슨 말인가.. 복잡하게 말고 쉽게 설명해 주게. 그래야 내가 이해를 하고 도와주던가 할게 아닌가."

" 나 참! 이렇게 하시면 저뿐만 아니라 여기 경찰서 계시는 분들도 좋지 않아요. 제가 웬만하면 이런 말씀 안 드려요. 잘못하면 서로 다칩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재촉하는 그에게 나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일관되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참. 이 친구. 사고 친 거 봐선 화끈한데 대화는 영~ 시원치 않는구먼. 그래그래.. 내가 먼저 화끈하게 이야기하지 자네 솔직히 이야기를 꺼내면 내가 전적으로 도와줄게. 그러니 툭 터놓고 말하게. 괜찮으니까..."



.....


"저는... 전임 시절 대통령특보였고 현 민자당 **구 지구당 위원장인 ***위원장님 청년부장 겸 보좌관으로 있는 ***입니다! 최근 큰 일에서 뒤집어진 민심을 확보해서 총선 승리를 위해 일하는 중입니다.!"


그. 리. 고....

나는 안주머니에 있던 의료기 전국 유통망 지도와 지방 지사 및 대리점 예상 고객 명단을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족히 수천 명의 명단에는 성별, 나이, 직업에 상관없이 작성된 가상 고객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뭔가??"

"전국에 관리 중인 저희 당.. 통책, 반책, 그리고 청년 조직원 명단입니다. "


경찰관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서가 있는 테이블로 가서 조서를 벅벅 찢으며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니! 이런 귀한... 우리 같은 일하는 사람이구만~~ 직원들이 사람을 못 알아봤구먼. 자. 여기 새로운 조서에 직접 간단히 상황을 적고 지장 찍고 약혼자 모시고 가요~ 순찰 나간 직원들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 테니까.. 걱정 말고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나가요~ 큰일 하실 분이 이런데 오래 있으면 안되지..."


나는 새로운 조서에 딱 두 줄을 기록한 후 지장을 찍고 여친을 깨워 경찰서를 나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택시를 잡아타고 차가 주차된 아파트를 향해 달렸다.


"충성!"

경찰서 정문을 통과하며 들었던 경비 의경의 경례가 귓전에 남았다.


조서 내용은 이랬다.

-아파트 내 주차 중 주민 차량과 약간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문제 발생 시 변상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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