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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Mar 11. 2021

한 사람의 일곱 편의 이야기

소설을 읽다

오랜 침묵의 무게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

작가의 독창적이고 예리한 시선을 피해 달아날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온몸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이야기에 첫 페이지부터 숨이 막힌다



언젠가 소설을 써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막상 손에 쥔 펜으로 끄적이는 건 일상 느낌이 전부다. 몰입감 있게 소설의 첫 문단을 여는 작가들의 이야기에 처음 문장만 몇 번씩 반복적으로 읽다가도 이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후다닥! 뒤 페이지를 넘기고 만다. 그러고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보기도 하고,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기도 하고, 때로는 나만의 느낌으로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내 주위는 소설 속 사건 현장으로 바뀌어 있다. 아직 소설 작가를 꿈꾸기보다 독자로서 더 충실한 나를 발견한다. 씁쓸....


모든 소설이 다 재미있고 배울만한 것은 아니다. 특히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단의 구성이나 문체, 도입과 사건의 전개, 작가의 시선과 문제의식 등을 골고루 양분으로 받아먹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꼼꼼하게 읽게 된다. 그래서 토지문학상과 같은 한국의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상 수상작을 찾아 읽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공부인 셈. 그 가운데 토지문학제 대상을 수상한 작가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놀이이자 배움터가 된다. 


아주 오랜 침묵 끝에 세상에 나온 일곱 편의 이야기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까지 뭐가 그리 어려울까. 그것도 이미 토지문학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까지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첫 작품 집필을 시작한 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첫 소설집이자 작품집 '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를 출간했다. 문학상 수상작 2편과 함께 5편의 이야기를 묶어 놓은 소설집, 그녀의 오랜 침묵을 깨고 어렵게 등장한 첫 작품이다. 


작가는 지독한 번아웃 증후군으로 고생하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한 꺼풀 한 꺼풀 내려놓기를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특히 소설의 기획부터 사진, 사진 속 모델까지 한 사람이 작업한 것은 물론, 각각의 이야기마다 해설을 덧붙여 놓는 대신 해설을 뛰어넘는 한 장의 사진으로 강하게 우리에게 어필하고 있어 이미지로 머리에 각인되는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안락 사회(토지문학대상 수상작)


"156번 안락사했음"

엄연히 주어진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녀석이 눈을 감으며 의식이 아득해져 갈 때 수의사가 내뱉은 한 마디의 말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감정이 복잡하게 올라왔다. 내가 그 녀석과 동일시된 느낌. 그건, 아픔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고 관조이기도 했다. 


녀석은 주인이 길거리에 버렸을 때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심을 보이며 다른 이의 접근을 피했다. 앙칼지게 이를 드러내 놓고 짖는 녀석의 심정에서 주위에서 왈왈거리며 짖어대는 개들의 목소리를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윤이라는 아이의 집으로 향하면서 녀석은 또 다른 세상을 접하게 된다. 곧 강제철거를 당해야 하는 빈민촌.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의 일상이 공존하는 곳. 철거 기계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녀석은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명품 진돗개가 아닌 잡종이라며 자신이 업신여김 당했다고 녀석을 버렸다. 그러나 누군가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보살펴 주었다. 178번 검둥이 역시 주인에게 버려진 개. 아파트로 이사 가야 하기 때문에 너무 큰 개는 키울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검둥이는 싸늘한 수술대 위에서 안락사했다. 저마다 버리는 데 이유를 대고 있다. 처음에는 좋아서 기르더니 결국에는 조건 때문에 힘없는 생명을 내동댕이치는 현실. 녀석은 그런 부류의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반려견을 대할 때 '가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가족이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아니다. 조건부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반려견을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파블로프의 개처럼은 만들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생명은 가치 없는 것은 없다. 다만 이기심과 우월주의, 권의 의식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못 볼뿐이다. 


"최변이 모르는 게 있다. 내가 언제인가부터 그의 휘파람 소리에도 침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한 날, 나는 다짐했었다. 가끔은 나를 속이기도 하는 저 소리에 침 흘리지 말자고. 그러자 정말로 휘익. 소리를 듣고도 더 이상 침이 고이지 않았다. “



코쿤룸


요즘은 비대면이니 언택트니 하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다. 코로나 사태 이후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든 단어들이자, 사회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나 역시도 하루 종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때도 많고, 3층에 앉아 컴퓨터와 씨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필요한 것은 인터넷으로 클릭 몇 번으로 주문. 다음날 집 앞에 배송, 먹고 싶은 것은 '배달의 민족' 어플 하나면 뭐든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시대가 올 걸 미리 예언이라도 한 걸까. '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 작가는 코쿤룸에서 오늘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소정은 작업실 겸 주거를 위해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햇볕을 차단하는 암막 커튼을 젖히지 않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다. 반드시 시계가 필요한 집이다. 요즘의 세태를 그대로 글로 옮겨 놓은 모양새는 그녀가 곧 '나' 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닿는다. 아니, 혼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 모습을 고스란히 발가벗겨 놓은 글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소정은 어릴 적 트라우마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철물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폭력과 엄마에 대한 폭행. 그 아픈 현장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던 어린 딸은 정서적인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아픔을 혼자서 꼭꼭 감추어 둔 까닭에 내면에서는 곪을 대로 곪아버린 상태다. 그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얼마나 지우고 싶어 하는지는 마지막 문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어 하는 트라우마가 존재할지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람을 만나는 대신 디지털 세계로 빠져들려고 하는지도. 그러나 상처 받은 마음의 치유는 사람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비대면, 언택트 시대일수록 더더욱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회복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휘발되어 가는 락스의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는다. 몸을 내려 정수리까지 묻는다. 입과 콧속으로 액체가 넘어 들어온다. 입을 벌려 마신다. 뇌로 스며든 락스가 썩어 가는 세포를 살균한다. 녹여 버린다. 위장이 싸륵싸륵하다. “



아름다운 나의 도시


'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 가운데 '이런 미친놈!'을 입 밖으로 내뱉고야 말았던 이야기다. 사실, 그 미친놈을 콕! 쥐어박고 싶을 만큼 괘씸한 생각이 들면서도 끝까지 조마조마하게 녀석의 행태를 뒷조사하듯 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 


'아름다운 나의 도시'라는 제목은 그 '미친 녀석'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아니. 그 미친놈이 사실은 우리 주변에 은근히 많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내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나 역시 '그 미친' 계열에 속해 허우적대며 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녀석은 형이 마련해 준 보증금으로 연예인이 되기 위해 얼굴을 작게 만드는 수술비용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다. 연예인이 되어 한 방 인생을 노리려는 심리는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불치병처럼 전이되었다. 남자 잘 만나 팔자를 고치려는 여성들의 눈에 그는 아무리 잘 꾸며도 촌티 나는 가난뱅이였다. 그래서 명품에 눈길을 주게 되고 고급 승용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씀씀이가 날로 커지기만 했다. 큰 씀씀이만큼 수익이 부족한 탓에 카드, 대출, 그리고 제2 금융에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끌어댈 수 있는 자금을 모두 끌어 사치를 하는 동안 빚은 눈 덩이 굴러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불어났고. 그런 상황을 탈피하고자 뛰어든 부동산 중개인이 적성에 맞아 현금을 만지는 자리에 있게 된다.


녀석은 남에게 보여주기 좋은 '머리 빈 그녀'를 애인으로 두고, 좀 더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수천만 원짜리 헬스클럽 회원권을 끊는다. 그리고 전세 계약금으로 사고 싶은 고가의 명품을 지르고 그 돈을 만회하기 위해 그가 찾은 곳은 강원도 카지노. 그러나 단 며칠 만에 빈털터리로 잭 팟 게임기 앞에 앉아 마지막 자존심인 명품 시계 바쉐론 콘스탄틴을 만지작거린다.


태어나면서 흑수저와 금수저로 나뉘는 시대. 이제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인생을 따라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린 세상. 외모라도 빛을 발해야 그나마 먹혀주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나의 도시'는 가진 것 없는 한 젊은이가 어떻게 해서든 신분 상승을 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야기를 담았다. 욕망이 거세질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했고, 타인이 계약금으로 걸어 둔 전세자금으로 명품 시계를 사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변명을 읊어댄다. 


그러면서도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본질적인 차이를 생생하게 표현해 내 오늘날의 세태를 씁쓸하게 들여다보게 한다. 다시 자신이 익숙한 도시로 돌아오는 녀석의 마지막 행보를 보면서 암처럼 온몸에 퍼진 그의 속물근성에 그의 인생 전반이 물 흐르듯 멀리까지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엄마는 은밀한 목소리로 이런 처세를 알려 주었다. 잘 들어 둬. 고스톱 치다가 바닥에 먹을 게 없잖냐. 그러니까 맨땅에 헤딩해야 할 상황에 처하거든. '비, 풍, 초, 똥, 팔, 삼' 일단 요 순서대로 버리는 거야. 이게 다 욕심부리자면 끝도 없는 패거든. 쥐고 있다가 쓰리고에 피박 쓰고 쌍코피까지 터지면 아주 끝장이야. 끝장."


도서 '일곱 편의 이야기, 일곱 번의 안부'는 그 외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자만의 독창적인 구성 방식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예리한 시각이 한 작품마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 '집구석 환경조사서'에서는 '응답하라 1988'과 같은 시대적인 정서와 묘사가 되어 있어 그땐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위트까지 숨어있다.


토지문학대상 수상작 '안락 사회', 그리고 문학상 수상작 '클리 타임 네스트라' 외 5편의 주옥같은 소설을 통해 깊은 사색과 함께 향긋한 커피 한 잔으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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