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문 냉장고

갱년기 부부, 그들의 사는 이야기(02)

by 동그라미

행복하고 싶다.


그래서.......


행복한가.


행복하고 싶다는 마음과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끼는 데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가 존재한다.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이 곧 행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오로지 마음의 작용에 달려있는 아주 묘한 녀석이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부족함을 느끼며 바라는 마음이 생길 때 불쑥! 튀어나오는 숨바꼭질의 고수 같다.


매일 진수성찬을 먹으며 전국에서 올라오는 좋다는 음식은 다 상에 올리는 임금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무리 좋은 음식, 맛있는 음식을 상에 올려도 임금은 손을 대지 않았다. 음식 타박을 하며 보내던 어느 날, 전국에 방을 붙여 자신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하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전국에서 이름이 난 요리사들이 궁으로 몰려들었고 각자 임금에게 자신이 가장 잘하는 요리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임금은 몇 번 집어먹기만 할 뿐, 손사례를 치고 물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백발이 성한 한 노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 "제가 정말 맛있는 요리를 대접할 테니 임금님께서는 제가 하라는 대로 따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임금은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에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러자 노인은 임금을 궁의 지하 감옥에 가두라고 지시했다. 임금은 당황했지만 자신의 말을 생각하고 노인이 하자는 대로 순순히 따라주었다.


노인은 임금을 옥에 가두고 3일을 굶겼다. 임금은 처음에는 노발대발 역정을 냈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조금만 기다리면 정말 맛있는 음식을 가져올 것이니 참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은 임금은 그대로 3일을 굶었고 약속대로 노인은 임금 앞에 음식을 가져왔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하얀 죽 한 그릇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임금은 갓 끓여낸 죽에서 올라오는 냄새에 군침을 흘리며 정신없이 퍼먹기 시작했다. 결국 바닥까지 핥듯 비워낸 임금은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다"라며 노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야기 속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춘 임금에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돌멩이처럼 씹힐 뿐이었다. 그러나 정말 배고픈 상태에서 먹게 된 한 그릇의 죽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음식으로 변했다. 평범한 한 그릇의 죽. 변한 것은 임금의 마음 상태였을 뿐이다.




우리 부부는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기에 남을 부러워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기댈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어깨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다. 넉넉지 않은 돈을 모아 꼭 필요한 것들로 살림을 마련하고 적금을 들어 좀 더 나은 집으로 옮겨갈 계획을 세우는 일은 모든 것을 갖추고 시작한 사람들은 잘 모르는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내가 정말 갖고 싶었던 냉장고였어!"


감격에 겨워 남편이 한 말이다. 16년 전, 한 사람이 가로누우면 꽉 들어차는 좁은 거실에 덩치만 커다란 냉장고가 들어섰다. '요한이네' 중고가전에서 구입한 양문 냉장고. 새 제품이지만 전시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중고로 넘어온 것을 남편이 운 좋게 발견하고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름 없는 브랜드지만 우리 부부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냉장고였다. 그것도 양문으로 된. 남편은 냉장고 설치가 끝나자마자 깨끗한 수건을 빨아 안팎으로 열심히 닦아냈다. 그만두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어루만지며 그 안에 들어갈 태세였다.


"그렇게 좋아? 아예 머리에 이고 출근하지?"


비아냥 거리듯 비꼬는 말로 추근대긴 했어도 나 역시 좋은 건 똑같았다. 비록 비싼 건 아니지만 최신형 양문 냉장고가 거실로 입성한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날 저녁을 자축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양문 냉장고는 지금도 주방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노란 해바라기가 붙여지고 냉동고 온도가 고장 난 상태지만 아직까지 쓸만하다. 몇 해 전 모터를 교체한 후 '앞으로도 20년은 거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기사님의 말에 요지부동 주방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하고 있다. 처음 우리와 인연을 맺을 때부터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오랜 친구가 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처음부터 내가 바랐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살았다면 이 양문 냉장고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졌을까? 월급을 아끼고 아껴 냉장고를 들여온 그날의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노력 없이 얻게 된 것은 어떤 성취감이나 행복감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질 것은 뻔하다. 아마도 처음부터 당연하게 얻어진 것이라면 남편도 나도 고장 난 냉장고를 쉽게 바꿨을 것이고 지금은 다른 냉장고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의 때 묻은 사연이 존재한다. 그래서 쉽게 버릴 수 없다. 툭툭! 먼지를 털어내듯 손길이 닿을 때면 문득 떠오르는 사연들에 가슴 한편에서 몽글몽글 올라오는 감정이 기분을 묘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것은 행복감 이리라. 가난했던 날,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딛는 드라마 주인공이 되었던 기분. 그래서 더욱 소중한 우리들의 젊은 날의 추억이다.


행복은 따지고 보면 멀리 있지 않다. '으쌰 으쌰' 냉장고를 나르는 남편이 있고 거기에 '아이~ 좋아!'를 연발하는 아내의 맞장구 사이에 존재한다. 갖고 싶었던 양문 냉장고라며 탄성을 지르고 깨끗이 닦아내는 손길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함께 마셨던 소주잔에도 행복은 존재한다. 그러니 너무 많은 것을 갖추고 살려고 하지 말자. 지금 당장 부족하더라도 하나씩 늘어가는 살림에서 진정한 행복의 크기를 만깍할 줄 아는 것.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는 서로가 있으면 그사이에 행복이 늘 숨어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