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스매시 앤 그랩: 보석강도단 핑크 팬더>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297] <스매시 앤 그랩: 보석강도단 핑크 팬더>
"그냥 음악에 맞춰 춤을 춘 거죠."
전 세계 최고이자 최악으로 악명 높았던 보석강도단 '핑크 팬더' 소속이었던 사내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속한 강도단은 유럽은 물론 중동과 아시아 일대 보석가게를 털며 수천억 원 대 피해를 입히며 명성을 얻었다. 누구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않았고 신출귀몰한 솜씨로 보석만 빼내 추종자까지 생겼을 정도다.
핑크 팬더는 1990년대 후반 등장해 2000년대 전성기를 보낸 보석강도단이다. 최고급 보석상만 골라 털었고 범행에 걸린 시간은 평균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강도단 내 수많은 팀이 있으며, 팀마다 실제 범행에 나서는 이들부터 설계자, 사전에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 밖에서 대기하는 요원이 나뉘어져 있다.
이들이 다이아몬드를 주로 훔치는데 범행 뒤 바로 국경을 넘고 다이아몬드는 조직 내 다른 이들이 세탁하는 방식으로 범행을 이어갔다. 십 년 넘게 이어진 범행에 피해는 누적됐지만 경찰은 이들을 검거하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국제 범죄조직의 탄생과 역사는 어떻게 얽혀있나
이들의 범행을 다룬 다큐멘터리 <스매시 앤 그랩: 보석강도단 핑크 팬더>는 이들의 전성기가 끝나가는 시점인 2013년 완성됐다. 유럽연합의 국제적 공조가 강화되고 이들의 본거지로 여겨졌던 세르비아가 국제적인 범죄자들을 더는 용인하지 않은 탓이다.
유럽과 중동을 오가며 영상저널리스트로 일하는 하바나 마킹은 수년 간 이들의 범행에 주목했다. 2009년작 다큐 <아프간스타>로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마킹에겐 두 번째 다큐였다. 첫 작품에서 아프가니스탄의 팝문화 열풍을 다뤄 중동에 대한 편견을 깨는데 일조한 그녀는 이번엔 범죄조직의 이면에 자리한 정치문제를 일깨운다.
전 유럽, 나아가 세계 최고급 보석상을 두려움에 떨게 한 핑크 팬더는 발칸반도가 본고장이다. 영화는 갑자기 지금은 해체된 구 유고슬라비아로 날아간다. 무려 1970년대, 지금은 갈갈이 찢긴 유고슬라비아인 모두가 존경했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살아있던 시절이다.
그 시절 발칸반도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달랐다. 아름다웠고 풍족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순 없었겠으나 발칸반도 위에 섰던 어느 나라보다 태평성대를 이뤘다. 다양한 민족, 문화가 공존했고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어울려 살았다.
밀로셰비치가 불러온 내전이 만든 범죄
다들 아는 것처럼 티토가 죽고 발칸반도엔 피바람이 불었다. 티토 이후 유고연방 지도자로 부상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티토가 내세운 형제애 대신 세르비아 중심의 통합을 주창했다. 이에 반발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에서도 민족주의가 부상했고 내전으로 이어졌다. 오랜 내전은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 일으킨 밀로셰비치의 이른바 '인종청소'는 평화로웠던 유고연방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말았다.
핑크 팬더는 이런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 오랜 내전 속에서 정상적인 일자리는 없었다. 전쟁에 나서거나 범죄를 하거나 가난하고 짓밟히거나, 그 사이에서 국민들은 선택지를 강요받았다. 많은 젊고 영민한 청년들이 범죄의 길로 들어섰다.
<스매시 앤 그랩> 제작진과 인터뷰에 나선 사내도 그런 경우였다. 좀도둑질과 밀수에서 시작해 점점 큰 범죄에 손을 댔다.
"음악에 맞춰 춤을 췄을 뿐"
1990년대 세르비아는 범죄를 대하는 특별한 정책이 있었다. 정부가 암암리에 범죄자를 국외로 내몬 것이다. 비밀조직이 나서 여권을 위조해 범죄자의 해외도피를 도왔다. 국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영화는 이렇게 국외로 나가 더 큰 범죄를 벌인 이들이 정부와 공조하는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핑크 팬더가 훔친 다이아몬드가 가공되고 세탁돼 다시 시장으로 공급되는 과정에 세르비아가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다. 범죄자가 세르비아로 도망치면 세르비아 경찰은 적극 수사에 나서지 않는 방식으로 범인도피를 돕고, 그 대가로 범죄수익 상당부분이 정치인 등에게 상납됐다는 내용이다.
이런 상황은 밀로셰비치가 실각한 뒤 세르비아가 유럽연합에 들어가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2010년대에야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췄을 뿐"이라는 핑크 팬더 조직원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내전이 지속된 발칸반도에선 범죄가 아주 가까이 있었고, 나라가 범죄자들을 더 큰 범죄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선택할 수 있지"
영화는 역시 유고연방 출신인 밀레나 밀레틱을 등장시켜 핑크 팬더 멤버의 주장이 꼭 사실이 아님을 입증한다. 학생시절 밀로셰비치의 폭압에 항거하고 훗날 탐사보도 기자가 되어 핑크 팬더 조직의 범죄를 뒤쫓은 밀레틱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범죄에 손을 담그지 않았다. 음악이 나온다고 모두가 같은 춤을 추진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가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스매시 앤 그랩>은 단순한 범죄자 추적을 넘어 그 범죄가 어디서 출발했으며 어떻게 진행됐고 그 배경엔 무엇이 있는지를 찬찬히 짚어내는 작품이다. 범죄 특성상 범죄자들의 증언을 직접 담아내진 못했으나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재연해 최대한 실감나게 연출했다.
10여년 간 전 유럽을 휩쓸고 여전히 일망타진되지 않은 핑크 팬더의 뒷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보다 나은 영화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음악이 없는 나라는 없다. 2021년 한국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꼭 아름답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있다. 1990년대 밀레틱이 그랬듯, 2021년 이 시대를 사는 우리도 우리가 출 춤을 직접 정할 수 있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