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나의 작은 동무> 영화평
세상을 비판하는 데 동심만한 도구는 없다. 모든 어른은 한때는 아이였고, 결국 그 시절을 잊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부터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같은 걸작들이 모두 이를 택했다. 꾸밈없는 눈으로 세상만사 부조리를 들춰내고, 때 묻지 않은 행동으로 인간의 본성을 내비치는 식이다.
아이였던 적 없는 인간은 없으므로 모두가 설득될 수밖에 없고, 더는 아이인 어른이 없으므로 모두가 겸허해지는 그런 작품이었다. 여기, 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부조리를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
인간사 비극이야 꼽자면 끝이 없겠으나 여기 여섯 살 렐로(헬레나 마리아 라이즈너 분)의 삶만한 이야기도 드물다. 어디 한 번 렐로의 삶을 들여다보자.
여섯살 소련 꼬마 렐로의 일상
때는 1950년대 초다. 소비에트연방 일원이던 에스토니아 공화국에서 렐로는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운동선수인 아버지와 학교 교사인 엄마에게 귀엽고 어린 딸이 있으니 가정은 평안하고 일상은 행복할 것만 같다.
영화는 시작부터 이들이 처한 현실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렐로가 아버지의 메달을 꺼내 제가 아끼는 장난감들 목에 둘러주고 놀려 한다. 메달 끈엔 하늘색과 흰색 줄무늬가 선명하다. 소련 가입 전 독립국 국기의 상징색이다.
어머니는 메달을 보자 황급히 이를 챙겨 감춘다. "가지고 놀면 안 돼, 아버지에겐 소중한 거야"하며 빼앗는 그 손길엔 어딘지 불안함이 묻어 있다.
불안은 곧 현실이 된다. 아빠 펠릭스(탐벳 투이스크 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친다. 스탈린 시대 악명 높았던 내무인민위원회(NKVD) 비밀경찰들이다. 군홧발로 집안에 들이닥친 이들은 살림이며 옷가지를 샅샅이 뒤진다. 그러다 천 조각 하나가 발견된다. 푸르고 희고 검은 깃발, 다름 아닌 독립국 에스토니아의 국기다.
엄마 헬메스(에바 클레메츠 분)는 검은 옷의 사내들과 함께 사라진다. 렐로에게 "착하게 지내면 돌아올게" 하는 말을 남기고.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들 조슈아에게 "꽁꽁 숨어 있으면 탱크를 선물로 줄게"라고 말하던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분)가 떠오르는 이 장면은 얼마나 안쓰러운가. 제가 더없이 사랑하는 이를 뒤에 남겨두고 위험 가운데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어른의 모습이 말이다.
평화로운 가족이 불운을 이겨내는 법
렐로는 정말 착하게 산다. 그 조막만한 손으로 걸레질을 하고 아버지가 먹을 식사를 준비한다. 말도 잘 듣고 울지도 않는다. 그리고 몇 밤이나 혼자 자고도 엄마가 오지 않자 "이건 다 아빠 때문"이라며 "씻지도 않고 냄새도 나고 그래서 오지 않는 거야"하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울어봐도 떠난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 걸.
영화는 렐로가 바라보는 세상을 위태롭게 그린다. 아빠가 없을 때 다시 집에 들이닥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제게 메달을 주면 엄마가 집에 돌아올 수 있다"고 꼬드긴다. 삼촌 하나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갔고, 온 가족이 매달려 구명을 해봐도 소용이 없다. 붉은 스카프를 목애 맨 소년단이 되고 싶다고, 자기는 숙녀가 아니라 동무라고 이야기하는 렐로의 모습에 아빠와 친척들은 웃음을 터뜨리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아름다움은 위태롭다. 문 걸어 잠근 고요한 가족식사, 할아버지의 생신축하 자리다. 아들 하나가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이제는 며느리도 잡혀가 조사를 받고 있다. 비밀경찰들은 에스토니아 국기와 메달, 학교 졸업장 따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맴돈다. 그 모든 불안 속에서 할아버지가 일어나 말한다.
"들어봐, 아들. 난 살면서 이 꼴 저 꼴 많이 봤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울하게 있어 봤자 하나도 도움이 안 돼. 에스토니아인들이 걱정하다 멸종된대도 스탈린이 신경이나 써? 우린 먹고 마시고 우리가 살아있음에 기뻐해야 해. 유럽과 미국에서 머지않아 우리를 도우러 오리라 믿는다. 함께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잔을 들자꾸나. 그들을 위해서라도 용감하고 강해져야 해. 자, 헬메스와 내 아들 에이노를 위하여!"
슬쩍 식탁 아래로 내려간 렐로는 제가 아끼는 소꿉놀이 세트를 펼쳐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고모들이 제 나라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함께 장난감 찻잔과 식기를 들어 건배를 한다.
정말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온갖 탄압과 위협 끝에 아버지는 렐로를 모스크바의 가족에게 잠시 맡긴다. 낯선 곳에서 렐로가 보내는 나날도 평온하지만은 않다. 그 천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위험들은 대체 얼마만큼 생생했는가.
하지만 정말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다른 순간들이다. 바람이 거셌던 어느 날 밤, 창가에 부딪치는 검은 나뭇가지에 렐로가 깨어난다. 낯선 방안, 세찬 바람, 검은 그림자... 렐로는 비명을 지른다. 엄마를 잡아간 검은 사내들이 또 왔다고, 고래고래 소리쳐 사람들을 깨운다.
황급히 올라온 할머니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네가 내 딸이었다면 볼기짝을 때렸을 거야"하고 말한다. 그러자 할머니, "당신은 강제추방 당할 때 뜬눈으로 가방을 붙들고 있었으면서, 애가 겪은 일을 생각해봐요"하고 쏘아붙인다. 렐로는 "할아버지는 나 못 때려요"라며 "매질 자국이 남으면 아빠가 복수할 거야"하고 이야기한다. 하하호호, 모두가 웃는다.
"네가 겁먹으면 집에선 어떻게 해주냐"는 물음에 렐로는 "노래를 부르고 춤도 쳐줘요"하고 답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노래하고 춤추는 기묘한 광경. 그렇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런 기억이야말로 세상의 온갖 불행과 고통에도 어른 안에 조그마한 아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붙드는 것이다.
"러시아와 독일과 폴란드인이 크라코니악(폴란드를 중심으로 동구권에서 널리 춰진 전통무용과 그 무곡)을 추는데, 멍청한 에스토니아인은 스텝을 완전히 잊어버렸네"하는 노랫말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의 뒤뚱뒤뚱 열심인 춤사위가 그야말로 장관이다. 관객은 한 명, 오직 렐로를 위한 공연이다.
살벌해 악몽 같았던 창밖 풍경이 어느새 따스한 렐로의 집 밖 풍경으로 뒤바뀐다. 세상을 구하고 사람을 지키는 건 걱정과 불안이 아니라 애정과 관심일지도 모른다.
어떤 불행과 마주쳐도 노래를 부를 수만 있다면
<나의 작은 동무>는 스탈린 막바지 소련이 낳은 부조리를 6살 소녀 렐로의 시선에서 그렸다. 엄마를 앗아가고, 아버지와 친척들은 불안에 떨게 하는 그런 종류의 불행들이 렐로의 삶을 위협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남겨진 건 할아버지의 생신 식사자리와 렐로가 악몽을 꾼 날 밤과, 비밀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아버지를 만난 순간들과, 아버지의 동료들과 만나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던 그런 순간들이다.
영화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떠한 불행과 마주해서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 우리가 걱정하고 우울해하다 멸종된대도 우리의 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러니 잔을 들고 노래를 부르자. 먹고 마시고 우리가 살아있음에 기뻐하기로 하자. 이 겨울, 우리보다 괴로운 누군가가 차가운 방 안에서, 거리에서, 국회에서, 법원에서, 각자의 적들과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라도 용감하고 강해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구하고, 우리 안의 작은 아이까지 구원할 수 있기를.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