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씨네만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호 Oct 13. 2024

불법체류자 체스 챔피언, 파힘의 기막힌 사연

오마이뉴스 게재, <파힘>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300] <파힘>


몇 년 전 프랑스, 선거를 앞두고 어느 라디오 방송에 총리가 출연했다. 시청자 질문을 받는 코너다. 한 여성의 전화가 연결된다. 마틸드(이사벨 낭티 분)다. 그녀가 총리에게 묻는다.


"방글라데시 체스 선수가 있어요. 집도 없고 체류증도 없는데, 방금 U12 프랑스 체스 챔피언이 됐지요. 아버지와 길에서 지내다 추방당하게 됐는데... 제 질문은 '프랑스는 진정한 인권 보장 국가인가, 아니면 그냥 인권을 선포하기만 한 나라인가' 그겁니다"


마틸드 앞엔 트로피를 든 소년이 서 있다. 영민해 보이는 이 소년 이름은 파힘 모함마드(아사드 아메드 분). 6개월 전 아빠와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엄마와 누나, 어린 동생은 방글라데시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빠가 "자리를 잡으면 곧 데려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조차 불법체류자 신세다.

   

▲ 파힘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불법체류자 체스 챔피언, 파힘의 기막힌 사연


파힘은 5분 전 프랑스 12세 이하 체스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성과였다. 프랑스 체스협회는 대회 직전까지 불법체류자에게 참가자격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완고한 협회장 앞에서 파힘의 스승 자비에(제라르 드빠르디유 분)는 이렇게 말했다.


"지노 페로니, 알프스를 건너왔지. 파시즘을 피해, 3형제와 걸어서. 1923년 마르세유에 도착했을 때 판자촌에 들어갔고 아무도 신경 안 썼어. 이태리 것들이라고 무시했지. 그러다 한 석수가 견습생으로 받아줬고, 악착같이 일했어. 석수의 딸과 결혼해 애들도 낳았고 손주도 보고 학교도 다 보냈지. 하지만 학교에서도 관대함은 못 배웠나보군. 기회를 주게."


어렵게 출전한 대회에서 파힘은 선전을 거듭한다. 프랑스의 재능 있는 선수를 줄줄이 물리치고 승승장구한다.


파힘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겪은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에서도 체스에 재능을 보였지만 주변 여건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러다 반정부시위에 나선 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기고 어느 날 갑자기 프랑스까지 오게 된 것이다.

   

▲ 파힘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방글라데시를 탈출해 프랑스에 왔건만


프랑스에서 마주한 현실도 따뜻하지만은 않았다. 일을 구하지 못해 거리에서 먹고 자다 임시보호소에 들어갔지만, 난민 인정이 되지 않아 그마저 쫓겨난다. 프랑스 이민국은 아빠 누라(미자누르 라하만 역)를 추방하고, 파힘은 위탁가정에 보내려 한다.


아빠와 함께 있겠다며 대회 출전을 거부한 파힘을 찾아 나선 자비에와 파힘의 친구들이 마주하는 광경은 시각적 충격을 던진다. 아프가니스탄과 소말리아인들은 파리 북부에,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파리 동쪽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난민촌을 찾은 이들은 간이 천막과 얼기설기 세워놓은 가벽 사이에서 살고 있는 갈색 피부의 방글라데시 사람들과 조우한다. 강에서 물을 길어 마시고 길에서 꽃이나 조악한 물건을 팔아 연명하는 이들도 프랑스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파힘이 있다.


11살 나이에 프랑스 U12 체스 챔피언이 되고, 13살 때는 전 세계 주니어 체스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파힘 무함마드다. 누구보다 영민하고 진실한 그 아이에게 프랑스는 좀처럼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 한다.

   

▲ 파힘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미화하지 않음으로써 명예를 지킨다


피에르 프랑소와즈 마틴 라발 감독은 프랑스를 미화하지 않음으로써 프랑스를 명예롭게 한다. 파힘을 괴롭히고 무시하며 짓밟으려 하는 이들을 백인 프랑스인으로 설정하길 꺼리지 않는다. 그에게 제대로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프랑스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반성하고 질책하게 한다.


한국에서 만든 비슷한 설정의 영화 <완득이>와 비교하면 이 같은 장점은 더욱 선명해진다. <완득이>에서 강조된 건 대체로 주변의 선한, 혹은 정감 있는 이웃들이었다. 부유하지 않고 사는 게 팍팍해도 곁에서 적극적으로 손 내밀고 서로 부둥켜안는 그런 이웃들 말이다.


절반은 한국인 피가 섞인 완득이는 선생에게 넘치는 관심과 애정을 받고 나라에선 적어도 공교육과 함께 햇반 정도는 공짜로 제공한다.


불법체류자와 난민에 대한 조명도 아쉬웠다.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 영화에서 언뜻 보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이고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진 못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한 사업가 정도가 이들을 착취한다는 설정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그보다는 일상 속 한국인들의 편견과 오해를 비추는 장면이 더 들어갔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 파힘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한국은 인권국가인가, 인권을 표방하기만 하는가


<파힘>이 특별한 건 프랑스 보통의 사람들이 어떤 시선에서 난민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파힘이 체스 챔피언이 되는 줄기 바깥에서, 외국인 노동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는 프랑스인들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맵시 있게 옷을 빼 입은 다른 선수는 파힘에게 "아랍인들은 축구나 하는 거 아니냐"며 비아냥대기도 한다.


꼭 부정적으로 대해서가 아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아서 그들을 절망으로 내몰기도 한다. 길에 앉은 파힘 부자에게 가볍게 동전을 던졌던 여인은 이들에게 얼마나 오래 시선을 주었을까 생각해 본다.


급박한 순간에도 체스에만 골몰하는 이에게 마틸드는 이렇게 말한다.


"참 프랑스답네요. 재난을 보고만 있죠, 가만히 서서."


제 조국, 제 국민들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제라르 드빠르디유와 이사벨 낭티 같은 이들이 출연한 점도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끝에서 우리를 돌아보는 건 필연적이다. 지난해 한국 난민 인정률은 채 1%를 넘지 못한다. 2020년 10월까지는 인정률이 불과 0.8%였다. 역대 최저치다. 보호율 역시 3.3%에 불과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 참석한 자리에서 "난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국제사회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말했었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좋은 영화는 공상으로 현실을 바꾸고 먼 것을 말함으로 가까운 곳을 일깨운다. 파힘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쯤에서 물을 수밖에 없다. 한국은 인권국가인가, 인권을 말하기만 하는가.



김성호

매거진의 이전글 가짜 작가를 연기한 이 사람... 거짓이 진실이 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