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438일> 영화평
가레스 존스라는 인물이 있다. 채 서른이 되기 전에 죽은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한 웨일스 출신의 촉망 받는 젊은이였다.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건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연방이 자행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즉 홀로도모르를 서방에 처음 알린 사실이 2000년대 들어 재조명되면서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관련 정보가 철저히 불문에 붙여져 있던 당대 소련을 세 차례 방문해 남몰래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취재해 서구사회에 알렸다.
최대 1100만명이 굶주림으로 죽고 국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어야 했던 홀로도모르 참상은 2009년 케임브리지가 존스의 취재일기를 공개하고, 다큐멘터리와 영화로 연달아 제작되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존스가 모든 걸 합법적으로 해낸 건 아니다. 그가 소련에 체류하기 위해 제시했던 이유는 허울뿐이었다. 실상은 소련이 가리려 했던 인위적 기근과 그 참상을 속속들이 취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당대 소련에선 명백한 불법이었다. 물론 그 누구도 오늘날 존스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저널리스트, 범법자? 가레스 존스와 줄리안 어산지
이번엔 더 가까운 얘기를 해볼까 한다. 미국 송환을 놓고 미국과 영국이 줄다리기 중인 줄리안 어산지 이야기다. 어산지는 호주 출신 언론인이자 사업가로, 정부와 기업의 부조리를 폭로한 위키리크스(WikiLeaks) 창립자다.
2007년 설립된 위키리크스는 이라크에서 미군이 민간인을 사살하고, CIA가 무장단체를 지원했으며, 중동 지역에서 미국과 동맹국의 오폭으로 상당한 수의 민간인이 죽어나가고 있다는 사실 등이 담긴 극비 문건과 영상을 폭로해 화제를 모았다.
그 과정에서 정보원 신상이 공개된다는 비판이나 국익이 직접적으로 침해받는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어산지는 모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일반에 공개했다.
수많은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지만 위키리크스 사태의 본질은 정부가 공개를 금지한 정보를 공개한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중 상당수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세계 각국에 자행한 범죄란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특히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중동 여러 정부의 부패상은 2010년대 튀니지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국은 어산지에게 17개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고 영국 법원은 이달 미국의 인도 요청을 거부한 상태다. 트럼프 취임 이후 극렬하게 갈라진 미국 내 여론은 어산지를 두고도 크게 엇갈린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저널리스트로서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와 국익을 저해한 스파이란 비난이다.
취재하다 징역 11년, 두 기자의 실화
여기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또 다른 언론인들이 있다. 스웨덴 신문기자 마틴 시뷔에와 사진기자 요한 페르손이다. 2011년 여름, 취재 차 몰래 입국한 에티오피아에서 정부군에게 붙잡힌 이들은 테러혐의로 징역 11년형을 언도받아 논란이 됐다.
예스퍼 갠스란트 감독은 영화 < 438일 >에서 마틴(구스타프 스카스가드 분)과 요한(마티아스 바레라 분)이 겪은 438일을 재구성했다. 스웨덴 석유기업이 에티오피아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취재하다 테러혐의까지 받게 된 이들의 사연이 관객들의 관심을 잡아끈다.
마틴과 요한은 소말리아를 거쳐 에티오피아로 몰래 입국한다. 그 과정에서 반군의 도움까지 받는다. 에티오피아와 스웨덴 석유기업의 부적절한 커넥션을 취재하기 위해선 밀입국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상황은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입국 직후부터 정부군이 따라붙고 며칠 못 가 생포된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마틴과 요한을 협박해 테러혐의를 자백하게 하고, 검찰과 법원이 짜 맞춘 시나리오대로 법원이 중형을 선고한다.
저널리즘의 숙명, 위험을 감수하는 것
둘은 스웨덴 현직 장관이 에티오피아에 부정한 영향력을 미쳤을 가능성과 에티오피아에서 정부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정황을 파악한 상태지만 이를 전할 길이 막막하다.
마틴과 요한이 에티오피아 법원에서 자신의 입장을 전하는 장면은 각별히 인상적이다.
마틴은 말한다.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작년에 술 취한 해적과 말라카 해협을 건넜습니다. 필리핀 홍등가를 취재하고자 인신매매범과 거리를 누볐습니다. 소아성애자를 쫓아 캄보디아로 갔습니다. 해적질하거나 인신매매하려고 돌아다닌 건 아닙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그렇습니다. 어떤 현상에 대해 알리는 거죠. 에티오피아행을 결심한 까닭에는 악의적인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욕심이라면 보도로 진실을 규명하는 겁니다. 석유산업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서 스웨덴 정부와 기업 사이의 결탁을 기사를 통해 알리고 싶었습니다. 불법 입국죄는 인정합니다. 위험성을 알았지만 그걸 감수하는 게 기자의 숙명입니다. 저하고 제 동료 요한이 매일 위험을 마주하며 사는 건 저널리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널리즘이 내포한 딜레마
< 438일 >은 저널리즘이 내포한 딜레마를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다.
어떤 진실은 국가에 의해 감춰지고 어떤 부조리는 법에 의해 비호된다. 스탈린의 소련과 오바마의 미국에서조차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불법과 부조리가 자행됐다. 에티오피아 독재정부와 눈 먼 스웨덴 자본이 결탁해 빚어낸 어떤 폭력은 무고한 이들을 고통 속에 밀어 넣는다.
진실을 감추고 부조리를 비호하는 권력을 고발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게 불가피하다면, 저널리스트는 그 불법을 행해야 할까. 또 이러한 이유로 저지른 불법은 면책되어야 할까.
멀리 두고 생각만 해보았던, 혹은 아예 묻지도 않았던 민감한 질문을 두 기자의 처절한 실화영화로 만나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저널리즘의 가치가 퇴색된 2021년 한국에서 특별히 큰 의미를 던지는 영화가 되어주길 기대한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