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기억의 전쟁> 영화평
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각양각색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모여 살며 각기 제 모양과 색깔을 뽐내야 더 건강한 사회가 된다.
오늘 흥한 것이 내일 망할 수 있는 첨단을 살며 민주주의는 제 장점을 마음껏 드러낸다. 소수자가 보호받고 언론과 결사의 자유가 보장돼 더 많은 생각과 사상을 품을 수 있다. 그 속에서 관용과 창의가 태어나 사회를 더욱 크고 깊게 한다.
발전한 다원주의 사회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수많은 갈등을 소화하며 위기를 극복하는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반면 갈등과 관용이 없는 사회는 무너지기 쉽다. 나와 다른 생각은 척결해야 할 방해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회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이 몰아치면 수위를 넘긴 댐이 무너지듯 한 번에 와르르 깨어진다.
어느 다큐 감독의 애국하는 방식
과거엔 오로지 권력자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곧 애국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을 외치던 그 시대엔 외화를 많이 벌어오고 GDP를 끌어올리는 것만이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었다. 그 시절 다른 가치를 이야기할라치면 뭘 모르는 한가한 이로 매도되기 십상이었다. 심지어는 반동분자로 찍혀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원주의 사회에선 모든 것이 다양하다. 심지어는 애국하는 방식도 다채롭다. 과거 저지른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이 애국일 수 있다.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직시하고 알리며 사죄하는 것이 모른 척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애국적인 일일 수 있다. 그런 이들이 늘어나 각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은, 한국이 과거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기억의 전쟁>이 바로 그런 영화다. 2014년작 <반짝이는 박수 소리>로 다큐멘터리계에선 꽤나 명성을 얻은 이길보라 감독의 작품으로, 코로나19 확산 속에 귀한 개봉기회를 얻었다.
영화는 베트남전 참전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다룬다. 1969년 베트남 퐁니-퐁낫 지역에서 민간인 69명이 사망한 그 사건이다. 보통이라면 생존자가 없어 증언할 이가 없었겠으나 그날의 학살에선 총을 비껴 맞고 죽은 척 연기한 생존자가 있었다.
1969년 퐁니에서 한국군은 무얼 했나
그는 한국군이 주민들을 우물가로 불러내 마구 쏘아 죽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현장 주둔군은 맹호-청룡부대였다.
공개된 미국CIA 보고서 등에 따르면 당시 미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가 한국군 사령관이던 채명신 장군에게 학살 진실규명을 요청했다고 한다. 또 2018년 7월엔 중앙정보부가 1969년 작성한 퐁니학살 조사문건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최소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양민 학살이 당시에도 논란이 됐었음은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한국 정부의 외면에도 이 같은 사실을 알리려는 베트남 생존자와 한국 시민단체의 노력을 담았다. 수차례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 이를 일반에 알린다. 이들의 노력으로 한국군의 전쟁범죄가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간 알려지기도 했다.
일본군 성범죄를 비판하기 앞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가 당시 한국군에게 윤간 등 피해를 입은 베트남 여성들에게 사과의사를 전하고 연대를 표명한 사건이 언론에도 보도됐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여전히 사과를 않고 있다. 사과엔 구체적인 사실 인정과 함께 배상책임이 따르는 데, 정부가 이를 인정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과 만나 "불행한 역사에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언급했으나 청와대는 즉각 공식 사과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 같은 일이 벌어진 2018년, 관련된 내용을 찍어낸 다큐멘터리는 제법 시의적절하다. 특히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끊임없이 공론화해 온 한국사회가 유사한 전쟁범죄인 한국군 학살문제를 철저히 소외시켜 온 모습은 아이러니한 감정까지 불러일으킨다.
어수선한 편집과 몰입을 방해하는 구성, 정돈되지 않은 촬영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의 고충이 적지는 않았으리라 예상한다.
인과응보라 했다. 원인과 결과는 서로 응답하고 저지른 잘못은 언젠가 돌아온다. 악은 끊고 선을 세우는 것, 우리가 기억 속 전쟁을 끄집어내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