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유어 아이즈 텔> 영화평
일본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강국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등 아시아를 넘어 영화 역사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거장을 여럿 배출했다.
현재까지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분야도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애니메이션이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 등 활발히 활동하는 애니메이션계의 거장들은 내놓은 작품마다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도 한다.
실사영화 부문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단연 돋보인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부상한 그는 현재 일본영화계의 몇 안 되는 기둥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본영화계의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한때는 예술성과 상업성을 고루 갖춘 작품이 두루 제작됐다면 현재 일본 영화계에선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곤 눈길을 끄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애니메이션과 외화가 점령한 일본 박스오피스
일본영화계의 현실은 역대 흥행작 목록을 살펴보면 한 눈에 들어온다. 역대 흥행순위 1위와 2위는 애니메이션이다. 2020년작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과 2001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300억엔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5, 7, 8위를 차지한 <너의 이름은>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모두 애니메이션이다.
할리우드 외화도 강세다. <타이타닉> <겨울왕국>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이 3, 4, 6, 10위를 기록했다.
남은 건 한 자리다. 역대 흥행순위 9위는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다. 흥행한 TV시리즈 에피소드를 떼어내 극장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흥행이 예고된다는 점에서 일본에선 흔히 있는 제작방식이다.
독자적으로 제작된 실사영화는 지난해 말 기준 역대 일본영화 흥행순위에 단 한 편도 올라있지 않다. 연도별 박스오피스 상황도 역대 박스오피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역시 해외 여러 인터뷰에서 "일본에선 사랑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투자받기 힘든 상황"이라는 고충을 거듭해 토로한 바 있다. 이와이 슌지가 지난 수년 간 미국과 중국 자본과의 합작영화를 시도하고 애니메이션까지 진출해야 했던 것도 이런 영향이란 분석이 많다.
유키사다 이사오, 이누도 잇신 등 해외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감독들조차 신규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 TV드라마 연출자와 겸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씨가 마른 각본, 난국 봉착한 일본 영화
원인은 다양하다. 연출자의 재량을 인정하지 않는 TV시리즈의 관행이 영화판에서도 이어져 다른 나라에 비해 외압이 극도로 심하다는 평가다. 과거 구로사와 아키라 같은 거장조차 외압과 투자실패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해 논란이 된 바 있다.
'실사는 할리우드, 애니는 일본'이라는 고착화된 수요를 바꾸기도 어렵다는 분석이다. 유능한 각본가와 연출자가 TV시리즈나 애니메이션쪽으로 빠지다보니 양질의 작품이 나오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다.
원인이 불러온 결과는 암담하다. 일본 영화계에선 오리지날 각본이 씨가 말랐다는 평가다. 흥행한 장르소설에서 빌려오거나 해외에서 값싸게 사들인 시나리오만 넘쳐난다. 그마저도 양질의 시나리오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달 개봉을 앞둔 <유어 아이즈 텔>은 일본 영화계가 처한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문화강국으로 군림하며 한국에 수도 없이 많은 원천을 공급해왔던 일본이 한국의 범작을 수입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이 된 작품은 소지섭, 한효주 주연의 <오직 그대만>으로 개봉 당시 100만 명이 조금 넘는 관객이 들었다. 한류가 강세를 보이는 데다 실사영화 중에선 그나마 감성멜로 장르가 흥행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아래 이뤄진 리메이크로 보이는데, 한국 원작을 일본이 다시 만드는 사례가 흔치 않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100만 겨우 넘긴 이 영화, 리메이크 역수입
기존엔 일본영화를 한국이 가져와 다시 만드는 사례가 일반적이었다. <링> <럭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리틀 포레스트> <조제>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만화나 소설, 드라마를 가져와 영화화한 건 이보다도 훨씬 많아 일일이 적기 어려울 정도다.
반면 한국영화를 일본에서 가져가 리메이크 한 사례는 찾기 힘들었다. <유어 아이즈 텔>이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
특이한 건 영화가 특별히 완성도가 높거나 한국에서 흥행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복서 출신이지만 과거의 사연으로 마음을 닫은 사내와 시력을 잃었지만 사랑스런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작품으로, <오직 그대만>의 이야기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다.
주인공은 킥복서 출신으로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안토니오(요코하마 류세이 분)다. 범죄조직에 가입해 무허가 격투에 나서던 안토니오는 범죄에 휘말려 감옥에 갔다 막 출소한 참이다. 안토니오는 범죄에서 손을 씻고 주차장 관리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여자가 있다. 시각장애인 아카리(요시타카 유리코 분)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둘은 가까워지고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질적 성장 이룬 한국영화, 반면교사 삼아야
이후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데, 범죄조직이 안토니오에게 다시 접근하고 위협을 느낀 그는 마지막 한 번의 대전을 수락한다. 하지만 상황은 꼬여만 가고 안토니오에게 예상치 못한 위협이 닥친다.
안토니오와 아카리가 만나고 사랑하게 되며 어려움을 겪고 다시 이를 해소하는 과정 대부분이 그저 우연에 기대어 이루어진다. 영화는 개연성보다는 두 배우의 감정적 변화에 집중하는데, 완성도 높은 영화보다는 관객에게 감성적 충족을 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원작에서도 드러난 문제이지만 리메이크에서도 딱히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없었단 게 문제다. 실제 최근 수년 간 한국에서 개봉한 기대 이하의 일본영화들이 비슷하게 드러내는 문제가 이런 점이란 걸 고려하면 그리 놀랍지는 않다.
<유어 아이즈 텔>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에 시사점을 던진다. 한때 세계의 위용을 뽐냈던 영화 강국이 어떻게 몰락할 수 있는지를, 자국 유명 영화인 다수가 각본의 문제를 지적하는 상황에서 사들인 해외 각본조차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창동과 봉준호 같은 거장에 더해 탄탄한 중견 감독들, 충분하진 않지만 제법 괜찮은 시나리오가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한국 영화계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