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저승보다 낯선> 영화평
영화란 무엇일까. 영상을 통한 오락일까, 그보다 나은 무엇을 추구하는 예술일까. 영화와 상업성, 그리고 예술에 대한 오랜 논의를 상기하도록 하는 영화가 개봉했다. 여균동 감독의 신작 <저승보다 낯선>이다.
영화는 무려 '낯선 3부작' 중 두 번째 편으로 불린다. 2018년엔 <예수보다 낯선>을 발표했고, 이번 편 말미엔 <지구보다 낯선>을 예고했다. 단 한 편으론 담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첫 편에선 신의 존재, 이번엔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었는데, 다음은 환경과 우주에 대한 것이 아닐까 다양한 추측이 오간다.
자무시는 천국을, 여균동은 저승을
영화팬이라면 '보다 낯선'이란 제목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짐 자무시의 1984년작 <천국보다 낯선>이 영화사에 확고한 존재감을 새겨 넣은 탓이다. 영화는 외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미국이란 나라, 대도시의 풍경이 얼마나 황량하고 건조할 수 있는지를 생경하게 내보였다.
화려한 실제를 더욱 부풀리는 데 골몰해온 할리우드 작품들과 달리 영화는 어느 곳에나 있는 낯설고 평범하며 사소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보였다. <천국보다 낯선>이 다루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는 친숙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영상으로 다루는 시선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낯선 것이었다.
짐 자무시의 관점과 태도를 여균동이 표방하려 한다. '낯선' 3부작은 신과 죽음, 우리가 딛고 살아가는 지구를 다시 바라보려는 한 영화인의 도전이다. 은근하고 끈기 있게 주제에 천착하는 태도가 근래 한국 영화에서 찾기 어려운 시도란 점에서 자무시의 그것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1990년대 영화인의 낯선 도전
그렇다면 여균동은 누구인가. 한국 영화팬치고 여균동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에 등장한 그는 연출과 각색, 연기 등 영화예술의 전 분야에서 나름의 경력을 쌓아올렸다. 1994년작 <세상 밖으로>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고, 문제작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주노명 베이커리> 등에 출연해 쉽게 잊기 어려운 연기를 펼쳤다. 각본과 각색, 기획으로도 다수 영화에 참여했으니 그야말로 만능 영화인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여균동의 영화역정에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그의 연출작 중 괜찮은 평가를 받은 건 사실상 데뷔작 <세상 밖으로>가 유일하다. 차기작 한국형 에로틱코미디 <맨?>부터 <죽이는 이야기> <미인> <비단구두> <1724 기방난동사건> 등이 모두 혹평을 면치 못했다. 여균동이란 이름이 브랜드인 건 분명한데, 누구도 명품으로 그를 기억하진 않는 것이다.
그런 그가 제 영화인생을 정리하려 한다. 이제껏 찍어온 영화들과 무게를 달리하는 이야기를 연작으로 찍기로 한 것이다. 신과 죽음, 그리고 지구라니, 가벼운 주제를 유쾌하게 푸는 데 집중하던 여균동 감독이 맞나 눈을 비비게 된다.
<저승보다 낯선>은 여균동에게도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음을 알게끔 한다. 구성부터가 하고픈 이야기가 없었다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영화다.
이해되지 않는 하찮고 시시한 대화로부터
내용은 이렇다. 영화감독 민우(여균동 분)는 어느 신도시 주변 황량한 길을 떠돈다. 불의의 사고로 코마에 빠져 몸은 병원에, 영혼은 황량한 길 위를 떠도는 것이다. 어째서 영혼이 그곳에 있는지,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그의 앞에 한 사내(주민진 분)가 나타난다. 자신이 죽었다고 믿지만 어째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사내가 끈질기게 민우에게 말을 건넨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황량한 길 위에서 민우와 사내는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하찮고 자잘하며 때로는 중요하고 철학적인 대화를, 관객은 가만히 지켜볼 밖에 도리가 없다.
영화는 민우와 사내의 대화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요해보이지만 허튼소리일 뿐이고, 허튼소리 같지만 완전히 허튼소리는 아닌 대화들이 러닝타임 내내 거듭된다. 대체 어떤 의도로 배치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낯선 건 물론이고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결말도 없이 그대로 끝나버린 영화를 두고 관객은 영화와 감독의 의도를 오랫동안 곱씹게 된다.
불행히도 영화를 본 누구도 영화의 목적과 의미를 명쾌하게 짚어내진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를 놓고 한참을 곰곰이 생각한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해법은 영화보다는 여균동이란 영화인에게 찾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능글맞게 던지던 여균동이 무겁고 진지한 물음을 지루하게 늘어놓기까지, 어떤 계기와 고민들이 있었음에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과 저승, 지구에 이르는 낯선 3부작도 결국은 여균동이란 영화인으로부터 쓰여질 것이므로. 여균동은 제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부디 저 자신을 낯설게 대해달라고 외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