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5

김훈, <칼의 노래>

by 김성호

김훈은 한국 문단에서 가장 걸출한 문장가다.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에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이 남긴 '한국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란 찬사는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 기자출신 작가들이 대개 문장력에서 약점을 드러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사실 이례적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트웨인과 헤밍웨이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듯이. 그냥 한국 기자들이 글을 못... 쓴다는 업계 일각의 소문이 흘러나오기도 했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그래서 김훈이 어떤 글을 쓰느냐. 백문이 불여일독. 대표작 <칼의 노래>에서 세 부분만 따왔다.


하나.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둘.
그리고, 면은 돌아서지 못했다.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허벅지를 찔렀다. 면은 왼쪽 다리로 버티고 서서 자세를 낮추었다. 살아남은 적은 셋이었다. 3명의 적을 앞에 두기 위하여, 면은 거듭 뒤로 물러섰다. 허벅지에서 피가 흘러 신발이 미끈거렸다. 면의 자세는 점점 낮아졌다. 면은 뒤쪽으로 퇴로를 뚫지 못했다. 반쯤 구부러진 면은 칼을 높이 치켜들어 머리 위를 막아냈다. 위로 뛰어오른 적이 내려오면서 면의 머리 위를 갈랐다. 면은 비틀거리면서 피했다. 적의 칼이 땅바닥을 쳤을 때 면의 칼은 다시 나아가 적의 허리를 베었다. 그리고 나서 면의 오른편 다리가 꺾여졌다. 면이 다시 세를 수습하려고 몸을 뒤트는 순간,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어깨를 갈라내렸다. 면은 칼을 놓치고 제 피 위에 쓰러졌다. 스물한 살이었고, 혼인하지 않았다.


셋.
내 시체를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여기까지다. 이런 필력이면 괄약근이 말을 거는 소설을 써놔도 눈물을 줄줄 짤밖에 도리가 없다. 분해서 바닥을 쾅쾅 쳐가면서.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걸 다 읽고도 잘 모르겠으면 아마도 취향이 달라서일 것이다. 모든 것에 수준이 있음을 불편해하는 쿵쾅이들의 세상에선 민감한 건 죄다 취향탓으로 돌려야 평안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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