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붐비는 집이니 합석은 자연스런 일이다. 근데 영 내키지 않는 모양, 점원이 되려 당황한다. 보아하니 현지인은 아니고 일본 아니면 중국인데 지가 전세냈나. 어깨가 빠지겠네 가방부터 턱 내려놓고 자리를 차지한다.
인사를 해도 대꾸도 않는 것이 영 특이하다. 반절 넘어온 그릇부터 제 쪽으로 당기니 나야 좋지 뭐. 먹는 꼴을 흘낏 보는데 뭔가 요상하다. 담긴 면발을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먹는다. 손가락을 확인하니 손톱도 바짝 잘려 있다. 빨간 불이다. 사진을 찍는 척 슬쩍 보아하니 패션도 과연이다. 여자라면 심심찮게 보았으나 남자라면 주의요망. 한 둘이 아닌 특이점을 서른이 넘도록 지켰다면 둘 중 하나다. 무리에서 건들 수 없었거나 건들지 않았거나, 또라이거나 난 놈이거나. 뭐 비슷한 건가. 말도 통하지 않는 타지니 굳이 일을 벌일 필요는 없다. 후딱 먹고 일어나기로.
마가 꼈는가, 썼다 지운 이 새끼와의 이벤트도 영 탐탁치 않은데 다음 일정도 가관이다. 올 시간이 지났는데 형님 좀 기다려 달란다. J와는 메일만 나눈 사이, 말하자면 현지 브로커다. 초면에 형님형님 하는 꼴이 같잖은데 첫만남에 늦기까지. 그래도 내가 을이다, 이정도는 참아야지. 한참을 기다리는데 형님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J가 웃고 섰다. 사실 J는 잘 보이지도 않고 곁에 선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흔치 않은 미인이다. 베트남 여자인가 했는데 그렇단다. 일단 자리에 앉는다.
J는 생각과는 다른 생김, 덩치는 크고 인간은 가볍다. 몇마디 나눠보니 형편이 없어 일이나 보고 뜨자 싶다. 그래도 미인은 대단한 것이라 마음은 그러한데 잡다한 이야기나 나누고 앉았다. 더듬더듬 영어도 하는 것이 그럭저럭 소통도 되는 것 같고.
그래서 맡긴 일은 어찌됐나요. J는 제 애인 손을 덥석 잡고선 요즘 연애를 시작하느라 어쩌고 저쩌고 딴 소리다. 십새가 디지고 싶나 싶지만 혹여 틀어질까 구했나요 못구했나요 다시 물어본다. 에이 구했지요 일 땜에 좀 늦는다니 밥부터 먹읍시다 한다. 시방새가 묻기 전에 얘길 해야지 싶다가도 자리를 옮겨 밥을 먹는다
이쁘지요, 하는 말엔 반박할 수가 없다. 환하여 주변이 돌아보는 미인이다. 형님 베트남서 사실 생각은 없습니까 여기 여자도 좋고 하다가는 제 애인 이름을 읊는다. 사내놈이 제 애인을 올리는 꼴이 영 형편이 없다. 이런 놈을 믿고 일을 맡기다니, 짜증이 치솟지만 어쩌랴. 여기 여자는 어때요 하여 말부터 통해야지 답한다. 그러니 어차피 한국여자도 말귀만 알아듣지 통하는 여자 몇이나 됩니까 하는 것이다. 뭐 그야 그렇지 싶긴 하다만. 가만 보아하니 이 자식 하는 것이 능통하다는 베트남어는 초등학생 수준이 될랑말랑 하는 듯, 그래도 서로 좋다하니 그것이 행복인가. 저 여자는 십분만에 드러나는 이 자식의 흠을 모르고, 이 자식 역시 저 여자의 흠을 알 길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J는 제법 멀쩡한 사내이고 상대도 빼어난 여성이다. 꽤 괜찮은 관계가 아닌가.
밥을 사먹이고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맡긴 일을 확인할 때다. 스물대여섯쯤으로 보이는데 서른이 훌쩍 넘었단다. 이름은 베트남말이라 모르겠고 무튼 역사를 공부하는 놈이다. 일단 몇가지를 물어보고 그로부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 들으면 들을수록 망이다. J놈은 눈치는 빠른 모양, 모르는 척 떠드는데 인간의 얄팍함은 감출수가 없다. 한국이라면 머리털을 다 뽑아놓겠으나 여기는 타지이고, 앞에는 미인이 앉아 있는 것이다. 나는 가만히 그에게 묻는다. 약속과는 다르지 않느냐고. 그는 이러쿵저러쿵 이제와 내가 요구한 사항이 어렵고 어쩌고. 대단한 요구가 아니지 않느냐, 그저 내가 묻는 것에 답하고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다시 제 나름의 시각과 정보를 더할 수 있는 이를 원했던 것이다. 틀림없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 중에선 어렵잖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런 앵무새같은 새끼를 데려와 앉혔으니 위키피디아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냔 말이다.
J는 또 어줍잖은 소리나 늘어놓다가는 베트남어로는 호쾌한 척 떠드는 것이다. 어차피 시간낭비일 듯하여 딴 놈 없으면 일어나겠다 하니 아니 형님 잔금은 어떻게 어쩌고 저쩌고. 하 이 시방새가 디질라고 턱주가릴 돌려놨으면 좋겠는데 싸우면 개쳐맞을 각이고 앞에는 미인도 앉았으니 달래듯 다정한 어조로 웃으며 야이개로 시작하는 몇마디로 마음을 토닥여주었던 것이다. J는 감히 따라오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우물쭈물 한다.
2023. 5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