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모임 여자 만나러 가는 거잖아요"

단상

by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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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모임 여자만나러 나가는 거잖아요. 쓰라는 글은 안 쓰고 또 개쌉소리다. 사내새끼들과 달리 여자애들이란 다루기가 어렵다. 가만히 두면 기어오르고 잘못 건드리면 쓸데없는 곳에서 기싸움을 벌이니 피곤이 이만저만 아니다. 아주 박살을 내놓자니 뒷감당은 어찌할 건가. 시간이나 채우고 돈이나 받아 땡치자고 그렇고 그런 수업을 이어갔던 것이다. 어차피 몇 번 보고 말 사이다, 그런 마음으로.


능글맞던 이 녀석은 글도 온통 능글이다. 좋게 보면 유연한데 깊이가 없다. 막히면 돌아가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해서일까. 부수고 파서 뚫는 일을 견디지를 못한다. 그건 그대로 장점이 되겠으나 세상엔 유연함만으론 이를 수 없는 경지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평균은 훌쩍 넘는 똘똘함이 있으니 입시 정도는 수월할 테다. 내가 도울 건 거기까지, 학생을 제자처럼 가르쳐선 안 된다는 걸 나는 일찌감치 깨우친 터다.


문학에 대한 글을 쓰다 책모임 이야기를 꺼낸 게 문제였다. 도대체 무슨 환상인지 매번 되도 않는 물음이다. 이 녀석 머릿속엔 랭보의 라 모르나 보부아르의 플로르 같은 카페 풍경이 펼쳐진 모양인데, 현실은 전혀 다르다. 어느 것은 반백수나 다름없는 불안한 글쟁이로 가득하고, 어느 것은 깃털 빠진 몸으로 추어대는 구애의댄스 현장이며, 또 어느 것은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는 직장인들의 자기만족적 모임이다. 어느 것은 내가 맞다 네가 맞다 끝까지 우겨대는 한심종자들의 옥타곤이고, 어느 것은 이룬 것 없이 늙는 게 두려운 자들이 서로를 마취총으로 쏘아주는 그렇고 그런 모임이다. 물론 교양과 품격을 갖춘 모임도 여럿이지만 그런 데만 나갈 것이라면 그토록 많은 모임에 참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내게 필요한 건 일상에서 만나지 못할 온갖 캐릭터였지 벗들보다 못한 인간들은 아니었던 탓이다.


왜 나만 글을 쓰느냐 정말 선생은 실력이 있느냐로 따지고 들던 녀석에게 처음 한 편 써준 것이 시작이었다. 마침 그주 모임에선 녀석에게 필요한 고전문학 여러권이 등장했고 나는 그 작품들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려 하였다. 그런데 쓰다보니 외로 재미가 있다. 말하자면 늙은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준 아르헨티나 서점 직원이 훗날 제게 울림을 준 책들에 대해 써내려간 그렇고 그런 글들과 제법 비슷한 냄새가 풍겼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책모임에 대한 글을 한 편씩 남기기 시작한 게 벌써 몇년이나 된 일이다. 어느덧 글을 쓰는 일이 모임을 갖는 주된 목적이 되고, 전처럼 모자란 놈들의 모자란 행각을 직관하는 악취미는 사그라들게 되었다.


어느덧 나는 테이블의 대화를 더욱 가치 있고 품격있게 이끄는 일, 그리하여 모임 뒤에 나올 글을 더 매력적으로 다듬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시시한 놈들이 한심한 짓을 하는 작태를 관찰하기보다는 우아하고 짜릿한 순간을 이루어내는 것이 훨씬 더 즐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못한 걸 낫게 하는 건 분명히 좋은 일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고, 못한 것을 낫게 하는 것은 좋은 연습이 된다. 책모임의 미덕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얘길 암만 떠들어봤자 어리석은 꼬맹이는 알아듣질 못할 테다. 그 애의 대가리 속에선 재미 있고 친절하며 잘생기기까지 한 사내가 시끄럽기만 한 어린 여자애한테 맹목적인 호감을 품고 무한대시를 하는 그런 말같지도 않은 장면만이 있을 것이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제 망상을 거듭 풀어놓는 꼬맹이 앞에서 그만 싸물고 글이나 쓰라고 닥달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가 아니겠나.



2023. 8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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