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키티, 에밀리 블런트의 섹시한 순간

단상

by 김성호

한 장 종이 위에 세계의 운명이 놓인 순간이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만난 어느 날이 그랬다. 낡은 신화 속에서 신의 불을 인간에게 쥐어준 프로메테우스는 오랫동안 처벌을 받아야 했다. 영화는 제가 훔치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지 못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제 가장 큰 성취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간을 쪼아먹히는 과정을 거의 공포스럽게 그려낸다. 영화는 그 고난의 과정 가운데서도 저의 존엄을 잃지 않는 자들과 또 비겁하거나 어리석고 위선적인 이들을 갈라 세운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 가운데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건 청문회에서 검사역을 노련하게 따돌리고, 또 훗날 어느 행사장에서 배신한 찐따와 끝끝내 악수를 거부하던 당찬 키티, 곧 에밀리 블런트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섹시한 순간이 바로 이 영화에 담겼다고, 나는 영민하고 당찬 여인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드문 매력에 격동되고 마는 것이다. 또 그로부터 나는 구두닦이를 비천하게 여기고 웨이트리스와 결혼하는 동생을 반대하던 저 잘난 오펜하이머를 이해하고 만다.



2023. 8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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