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상실의 병증이 깊어지는 새벽이 있다
쉬운 시란 외면받기 쉽다는데 그대가 읽어낼 수 없는 시란 무가치하여 쉬운 시를 써낼 밖에 없는 일이다
졸음이 들이닥친 저녁
쓰러지듯 무너진 간이소파가 가라앉아 있는 시간
내게도 있었던 너와
내게는 없었던 누구
그 사이를 하릴없이 오가며
한때 내가 가졌고
한때조차 허락되지 않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을
그 미묘한 나날 사이를 헤매고만 있는 것이다
어느 큰 부자는 평생 일군 재물을 팔아 왕래가 금지된 땅에 겨우 들어섰다는데
첫사랑 처녀는 이미 죽어 만날 길 없고 빛바랜 산은 쳐다보기도 싫어지고
오래 돌아 허얘진 머리들만 보고 마는 날이 있는 것이다
상실의 병증이 깊어지는 새벽은 지나간 마음들만 붙들어 세운다
바로잡지 못할 선택들과 되돌릴 수 없는 사연들이
영원히
꼭 그대로 되풀이될 것만 같은 지금
하도 보아 대사를 줄줄 외우는
이제는 낡아버린 어느 영화처럼
나는 지난 잘못들을 가만히
그저 가만히 바라보고만 앉았구나
상실의 병증이 도진 새벽
나는 겨우 뜬 눈을 애써 다시 닫고서
내가 보았고 이제는 보지 못할 표정들만 슬며시 아주 슬며시 쓸어내릴 일이다
2023. 8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