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그런 구간이 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바로 옆에서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구간 말이다. 덜컹이는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지는지 손바닥만한 가방을 배낭이랍시고 맨 꼬마가 이리저리 휘청이다 차량문을 짚는다. 머리통 두개는 더 큰 형이 제 귀에 손을 올리고는 메롱- 혓바닥을 내민다. 아이는 뺑그르르 돌아서는 제 엄마의 푸근한 뱃살에다 와락 머리를 묻는다. 어이구 무서워쪄 토닥이는 아줌마 표정에서 행복을 읽는 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내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두려워 엄마 뒤에 숨고, 품 안을 파고드는, 아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수록 더욱 큰 행복감을 안기는, 그런 순진무구함 말이다. 후회한다.
퇴행성 질환이란 걱정마저 퇴행시킨다. 한달만에 찾은 엄마는 그간 모아둔 수두룩한 걱정꺼릴 잔뜩 토해놓는다. 나는 그중 정말로 걱정이랄 게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도 좋다. 이런 것들이라도 마음을 쓰게 한다면 고마운 일이다. 나는 애써 바로잡지 않는다.
공항철도와 9호선은 김포공항역에서 교차한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9호선으로 갈아타면 요동치는 차체도, 비명 같은 소음도 더는 없을 것이다. 아줌마의 행복감도 그대로 그치겠지. 승강장을 가로질러 급행열차를 기다리는 줄에 다가설 때 우두두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웬 녀석이 바닥에 속을 게워내고 있다. 열살쯤 됐을까 싶은 녀석은 제 모습이 창피한지 토위에다 울음까지 쏟아낸다. 최악이다. 구경하는 애들을 물리친 선생은 가방을 뒤져 찾은 것들로 토사물을 닦는다. 토한 아이는 울고 다른 아이들은 웃고 아무도 아닌 사람들만 무엇도 아닌 표정이다. 나약한 자식 고개를 돌리는데 불현듯 옛 기억 한토막이 들이친다.
토한 것은 나고 곁엔 친구가 섰다.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엔 이곳 김포공항에서 국제선 비행기가 떴다. 나는 공항 바닥에 아침에 먹은 것들을 죄다 게워놓았다. 친구는 어디서 대걸레를 가져와서는 웃는 건지 찡그리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박박 밀어 닦는다. 나는 비밀이라고 말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 시간쯤 뒤면 우리는 일본으로 갈 비행기를 탈 것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에게 첫 비행이었을 테다. 아버지를 따라 유럽이며 호주며 온갖 곳을 오갔다는 부잣집 아들놈은 우리가 흥분할 수록 더한 허풍을 떨어댄다. 우리 머릿속에서 비행기는 수직으로 솟구치는 우주선이다. 소닉붐이 터지는 양 날개 뒤로는 색색깔 불꽃들이 터져나갈 것이었다. 모든 저항을 뚫고 기체는 우리를 일본으로 데려가고 비행사들은 너덜거리는 기체를 뜯어다 교체한 뒤 우리를 다시 한국으로 돌려놓을 것이다. 하늘엔 우리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 많고 재수없는 녀석들은 비행을 끝내기도 전에 심장마비나 그 비스무리한 것들로 죽어나자빠질 운명이다. 그렇게 죽는 사람이 허다하여 여적 사람들은 차와 기차,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이라고 우리는 마음대로 상상하였다. 나는 내가 강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고 어쩌면 이 못난 녀석들 가운데 가장 먼저 심장마비에 걸려 죽는 수치를 당하고서 바로잡을 기회조차 없는 시체로 끌려내려와서는 부끄러운 자식이라 전해지는 광경을 떠올렸다. 여권을 걷을 때부터 덜덜 떨리는 몸은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고 끝내 치밀어오르는 나약함을 바닥에 쏟아내고야 만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타야지.
비행은 허무했다. 그 커다란 몸집을 띄우는 게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비행기는 살포시 날아 가만히 착륙했다. 카운트다운도 없었고, 수직으로 발사되거나 음속으로 날아가거나 뭐 그런 일도 없었다. 아무 위험도 없이 부웅- 날아 척- 착지하는 비행이라니. 비행기가 뜨자마자 헛소문을 퍼뜨린 녀석에게 날아든 사탕은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야유였다. 실망이 가득 들어차서 조용하기만 했던 비행이 끝난 뒤 친구는 겨우 이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때 아마도 평생을 떨치지 못할 단어를 처음으로 썼던 것이다.
"시시해."
그로부터 나는 내 시대에 진실로 모험이라 할 것이 남겨지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 시대 어른들은 너무나 나약하여서 아무도 죽지 않는 비행과 누구도 상하지 않는 여행, 두려움과 흥분에 휩싸여 토하는 이는 오로지 아이들 뿐인 세상을 자랑이랍시고 남겨준 것이다.
그러니 아이야,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열차를 쫓는 귀신도, 불꽃을 튀기며 도망치는 열차와 그러다 탈선하여 엎어지는 사람들과 뒤엉켜서 비명을 내지르는 이들도 없는 것이다. 대신 세상은 구역질을 일으키는 온갖 시시한 것들로 가득하니, 네가 쏟은 토는 절대로 창피한 게 아니란다.
2023. 8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