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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새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AI 조류 살처분 소식을 듣고

by 김성호

AI 발병소식에 전국 수백만마리의 새가 일시에 공포의 대상으로 변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집에서 키우던 앵무새까지도 내버리고 지나가던 비둘기가 지붕에 똥 쌌다고 방역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친다니 말 다한거다.


퍼지기도 엄청난 속도로 퍼지고, 걸리면 죽어버린다기에 양계장 닭들은 물론이고 동물원의 거위에 호수의 오리까지도 새라면 모두 다 잡아다 살처분 하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죽어나가는 새가 얼마나 될 것인가. 새에게도 영혼이 있고 저승이 있다면 염라대왕이 과로로 쓰러져 몇달은 족히 요양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양이다.


뭐 어쩔 수 없는거다. 퍼지는 속도도 워낙 빠르고 백신조차 충분한 양을 구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인간의 안전을 위해서는 살처분 하는 방법만큼 확실한 것이 없으니 말이다. 요즘같아서는 봉황이든 주작이든, 하다못해 날개만 달렸다면 저 유니콘이라도 잡아다 살처분하는게 당연한 거다.


살처분이라는게 사실 별거 없어서 어떤 새들은 산채로 땅에 묻히기도 하고 자루에 담겨 삽으로 맞아 죽기도 한다. 동물보호협회에서는 하다못해 안락사라도 해달라며 호소하지만 나라에서는 국민의 보건이 직결된 워낙 시급한 사안이다보니 어쩔 수 없다며 하던대로 하고 마는 것이다. 당연한 거다. 여긴 인간을 위한 나라니까.

하지만 오늘도 수천마리의 새들이 살처분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슴 한 편이 짜르르 아려오는 것은 왜인가. 어차피 양계장의 닭들은 백날 알만 낳고 고기만 생산하다 죽는거고 동물원의 가금류들은 평생 우리에 갇혀 푸른 하늘 한 번 날아보지 못하고 죽을 운명인 것인데 뭐가 아쉽고 모자라서 내가 이리도 아픈 것인가.


아직 병이 든 것도 아니고 그저 병이 걸릴 지도 모른다는 것 뿐인데 억울하게 삽에 맞아 죽는 새가 있다. 산 채로 땅에 묻히기도 한다. 바로 어제까지 대공원에서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희생하던 새들이, 바로 어제까지 양계장에서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한 몸을 희생하던 새들이, 바로 어제까지 건강하게 살아가던 새들이 죽어가고 있다.


생각해 본다.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생명에 경외를 느낀 소년이 다음 날이 되어 개구리를 해부실습하는 시간이 오자 개구리의 배를 가르는 대신 교실의 모든 개구리를 마취에서 깨워 풀어주는 그 혁명적인 순간을. 어찌 이 순간의 감동을 순수한 혁명가의 그것보다 못하다 말 할 수 있을쏘냐!


생각해 본다. 조류를 위한 나라를. 나라 안에 새들밖에 없어서 아픈 새도 요양할 수 있고 건강한 새는 날아갈 수 있는 그런 컨셉의 나라를. 어째서 이 땅은 모든 것을 인간이 소유하고 새들은 그런 인간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것인가.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존재를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거다 라고도 생각해 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다른 생명을 소유하고 그 생명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이는 것은 어쩌면 용서받지 못할 행위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곧 뒤따른다. 휴머니스트이기 이전에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셨던 그 분께서 살아계셨다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나는 곧 히치콕의 <새>처럼 조류의 반격이 시작되어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이 영화에서 조류학자 할머니는 말했다. "새가 인간을 공격할 이유따윈 없어요." 그 때 아저씨는 후라이드 치킨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새는 인간을 공격할 이유가 충분하다. 그 생각이 하나도 없는 듯 보이는 눈으로, 인간을 째려볼 이유가 차고 넘친다.


너무나 불쌍하고 너무나 죄스러워서 나는 곧 청와대 사이트에 달려가 상황이 허락하는 한에서라도 새들을 안락사 시켜주십사 청원하였다. 내가 보아도 이렇게 급박하고 심각한 상황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이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소풍 때 어린이 대공원에서 보았던 큰 새장에 갇힌 이름모를 커다란 새의 외마디 비명이 떠올라 정말이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2008. 5. 11. 일요일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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