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굳바이 광수형

추모

by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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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형이 떠났다는 뉴스를 보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특별히 좋아했던 문인이나 교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연이 없었던 것도 아니기에 마음이 쓰이고 그렇네요.


마교수와의 첫 만남은 대학 입학 직후였습니다. 연대 3대 명물이니 뭐니 하는 말에 청강했다가 작품을 보는 눈과 세계관에 크게 실망해 돌아섰었죠. 지난 시대에는 파격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새로 오는 시대에는 구태가 되고 만 그와 그의 글들은 구석에서 쓸쓸히 나이만 먹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쩌면 그때 저는 이 사람의 최후가 그리 좋지만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아요.

작가로서 어떤 의미에서든 온 세계와 맞부닥칠 수 있었던 것, 온 세상의 주목을 받고 비판과 옹호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저주라기보단 축복에 가까운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본인의 깜냥에 달린 것인데 그를 이겨내고 더 큰 문인이 되지 못한 건 오로지 마형의 그릇이 그쯤밖에 안 되었던 탓이 아닌가 하는 게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은 제 판단입니다.

제가 마형을 다시 찾은 건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서 였습니다. 취직을 하려면 학점이 3점대는 돼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에 3학년 2학기까지 간신히 2점을 넘긴 학점을 세탁하는 프로젝트에 열중하던 때였죠. 글쓰고 토론하고 발표하며 출석은 깐깐하게 안 보고 시험은 몰아서 한 번에 보는 과목이라면 무엇이든 수강했습니다. 학기 내내 레포트 한 장에 시험 한 번이 전부며 출석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마교수 수업 두 개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죠.

당신은 제게 A+ 두 개를 줬고 저는 그해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아 총점 3점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어느 면접에서든 '자네는 학점이 왜 이모양인가' 하는 질문을 받지 않은 적이 없으니 제도권에서 취업에 성공하고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마형이 상당한 도움을 주신 건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연히 배에 가져온 대학시절 파일에 당시 레포트가 꽂혀 있더군요. 중간대체 레포트로 주제는 로맨스 쓰기였지만 야하지 않다면 A등급을 받을 수 없다던 그 전설의 과제 말입니다.

당시 주변으로부터 사내라면 이 글을 읽고 몸을 곧추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었죠. 체질인데 몇 편 더 써볼까도 했습니다만 너무 바쁜 시기였기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끝장이던 학생에게 마형은 그래도 숨통이 트이는 학기를 선사해준 은인이었습니다.

당신의 책과 수업에선 시대를 앞서 고통받았다는 불평 가운데 시대착오적인 관점과 피해의식이 읽혔고, 평등과 자유를 가장한 혐오와 편견도 적잖이 묻어났지요. 하지만 그 모두를 지적하고 비판한 학생의 답안지에도 좋은 점수를 준 너그러운 게으름도 갖고 계셨습니다.

돌아보면 드린 건 적고 얻은 건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 9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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