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식어도 맛있는 커피처럼

작문

by 김성호

어느 반가운 만남이 있던 오후, 처음 가보는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 깊숙한 구석자리 테이블에서 주인 아저씨가 내려준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있다는 농장이름을 딴 드립커피를 마셨다. 어떻게 커피를 좋아하게 되느냐는 서툰 질문에 붙임성이 좋아보이는 주인아저씨는 식어도 맛있는 커피가 좋은 커피니 우선 천천히 음미해보라고 하였다. 따뜻하게 나오는 음료는 식기전에 마셔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식을 때까지 천천히 마시라니 한 편으로 어색하고 한 편으론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대화가 뜨거워지는 것과 거의 같은 속도로 커피가 식어갔기에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식은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뜨거운 커피는 따스한 온도에 덮인 채 부드럽게 넘어갔다면 식은 커피에서는 차분하고 보다 진짜에 가까운 맛이 느껴졌다. 들이키자마자 목구멍으로 향하는 대신 혀에 한 순간 더 머무는 것이 뜨거운 커피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달까? 딱히 더 맛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색다른 향취가 있는 좋은 느낌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꼭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지는 않은가 생각해 본다. 따스한 커피 특유의 부드러움과 친숙함이 커피를 음미하기보다는 쉬이 삼키게 만드는 것처럼, 인간관계의 온도가 나와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젊은이 특유의 맹목적인 열정이, 외로움에 기인한 절실한 애정이, 실은 상대방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본모습을, 나아가 상대방의 본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만남의 열기에 취한 나머지 사람보다는 관계 그 자체가 주는 만족감에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진실로 알고 싶다.

남녀의 관계는 물론이고 단순한 친분의 관계에서조차 사귄지 한참이 지나서야 뒤늦게 상대의 진면목을 알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대부분은 알아가는 시간이 부족했다거나 진면목을 알기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관계에 도취되어 있었던 탓이 아닌가 한다. 관계의 열기가 그 관계의 가치와 상대방의 진면목을 자주 가린다는 말인데, 이런 경우엔 마치 식기전에 그럭저럭 마실만 했던 커피가 식은 후엔 도저히 삼키기 어려운 액체 쯤으로 전락하는 듯한 느낌을 맛보기 십상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열렬한 사랑으로부터 헤어나고 나서야, 맹목적이었던 동경이 깨어진 후에야 상대방의 그리 대단치 않은 진면목을 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우린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정답은 맛없는 커피를 식기전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식어도 맛있는 커피를 고르는 것일 테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커피를 고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고, 그 안목은 끊임없는 공부를 필요로 한다는 것 역시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2010. 8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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