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지중해에서

바다

by 김성호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추스르며 식탁에 앉는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생선을 굽고 있다. 고등어 두 마리. “아 좀 다 차리고 깨우라니깐” 불평하는 내게 “아드님, 여기 밥부터 좀 받아가세요~”하고 딴 소릴 한다. 엄마의 특기다. 거실 소파에서 그렇고 그런 드라마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생선을 굽는 날이면 으레 그렇듯 부엌을 향해 외친다. “여보, 생선 냄새가 진동을 하네. 후항 좀 틀어!” 엄마가 환풍기 버튼을 누르자 벽에서 ‘딩~동~댕~동~’하고 벨소리가 울린다. 잠이 확 달아난다. 그런데 응? 벨소리라고?

꿈이었다. 나는 선실 침대 위에 누웠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온 방 안을 휘젓고 있다. 효과 좋은 벨소리는 남은 잠을 경비원처럼 내쫓는다. 새벽 네 시부터 여덟 시까지, 이항사와 당직근무를 마치고 내려와 오전 내내 단잠을 잤다. 지중해에 들어서면서부터 배가 흔들리지 않아 평소보다 깊이 잠이 든 모양이다. 얼마나 달게 잤는지 눈을 뜨면 서울, 내 방일 줄만 알았다.

사각으로 크게 난 선창을 여니 음료수 광고에나 등장할 법한 바다가 눈앞에 화악- 하고 펼쳐진다. 듣던 대로 지중해 푸른 바다다. 수면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이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재빠르게 명멸한다. 저 멀리 그물 놓는 어선 뒤로 하늘과 바다를 갈라놓는 수평선이 선명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풍경이란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일 테다.

크리스탈호는 왼편에는 유럽, 오른편엔 아프리카 대륙을 놓고 전 속력으로 동진 중이다. 목적지는 지중해 동남쪽 끝단의 포트사이드. 이집트의 항구로 수에즈 운하의 지중해 쪽 입구다. 우리는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중동지역 항구 몇 곳을 들른 뒤 그대로 동진, 7월 초엔 한국 평택 항에 입항한다는 계획이다. 지브롤터에서 포트사이드까지는 1962해리, 크리스탈호의 속력으로 닷새가 걸린다.

지중해는 연중 온화한 날씨로 조류나 바람도 다른 큰 바다에 비해 강하지 않아 항해에 큰 어려움이 없다. 6월 초 지중해에 진입한 우리도 순항을 계속했다. 초속 10노트 미만의 미풍이 선선하게 불고 배 주위엔 낮은 파도가 찰랑댄다. 문제될 건 없어보였다.

하지만 이 바다를 지나는 내 마음은 편치가 않다. 21세기 초 지중해의 또 다른 이름은 ‘난민의 무덤’이다. UN통계에 따르면 올 1월부터 5월까지 모두 3만5000여명의 난민이 지중해를 건너 유럽 대륙에 도착했다. 매년 4000명에 달하는 난민이 지중해에서 실종되거나 목숨을 잃는다.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난민들은 전쟁과 가난, 종교의 이름을 빙자한 억압을 피해 목숨 건 항해에 나선다. 창구는 무아마르 카다피가 사망한 뒤 무법지대가 된 리비아로, 이곳에 근거지를 둔 브로커들이 아프리카와 중동 전역에서 몰려든 난민들에게 대가를 받고 이들을 배에 실어 유럽으로 보낸다. 그런데 이 배라는 것이 지중해 큰 바다를 건너기엔 턱없이 열악하다.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안전상 문제는 물론이고 식수와 음식까지 부족해 구조를 받지 못하면 빠져 죽거나 굶어죽기가 십상이다.

구조된다고 해도 상황이 다 좋아지는 건 아니다. 이탈리아로부터 지원을 받는 리비아 해안경비대에 붙잡혀 난민선에 오르기 전보다 못한 상황이 되는 경우도 적잖다. NGO 단체에서 운용하는 난민구조선에 구조된 경우에도 유럽 각국 항만이 이들을 받아들이기까지 마음 졸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운이 좋아 유럽까지 건너간다 해도 위험이 곳곳에 도사린다. 브로커가 난민들을 속여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넘기는 일이 잊을만하면 언론에 보도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음에도 수십만에 달하는 난민들이 리비아에서 목숨 건 항해를 기다리고 섰다. ‘쿠르디의 비극’을 통해 널리 알려졌듯 난민의 상당수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다. 어린 자식을 이토록 위험한 항해로 이끌어야할 만큼 난민들의 오늘이 절박한 것이다.

우리 배가 지중해에 접어든 6월 초에도 비보가 들려왔다. 2일 밤 튀니지 연안에서 난민 100여명을 태운 선박이 침몰해 48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3일에는 터키 근해에서 난민들이 탄 보트가 침몰해 탑승자 9명이 숨졌다는 소식이다. 튀니지 사고해역은 우리 항로와 불과 100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아 소식이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날 나는 당직시간 내내 바다 저편을 망원경으로 꼼꼼히 훑었다.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그곳에 간절히 도움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배가 수에즈를 통과한 10일에는 난민 629명을 태운 구조선 ‘아쿠아리우스’ 입항을 놓고 이탈리아와 몰타 정부가 마찰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약하자면 ‘나는 못 받는다, 네가 받으라’는 것으로, 이들의 치열한 대립은 아쿠아리우스가 식수와 식량을 거의 소진하며 일주일 넘게 표류하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 스페인의 결단으로 종료됐다. 하지만 이들의 충돌은 열흘 후 난민구조선 ‘미션 라이프라인’이 234명의 난민을 구조하자 재발했다.

전쟁은 지속되고 가난은 심화된다. 난민은 거듭 죽음의 바다를 건넌다. 가장 선한 자가 가장 큰 부담을 지는 게임이 반복된다. 세계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 물에 빠져 죽거나 목말라 죽도록 바다 위에 버려두어야 하는가, 끝없이 밀려오는 난민에게 국경을 열어젖혀 언제까지일지도 얼마 만큼일지도 헤아릴 수 없는 짐을 떠안아야 하는가? 신이 없는 바다에서, 가장 현명한 이도 해법을 내놓지 못한 문제를 두고 나는 한참을 씨름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한국을 둘러싸고 많은 난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오늘의 유럽보다 더욱 큰 혼란에 빠질 게 자명하다. EU는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와 몰타의 방침을 놓고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와 같은 환경에서 그보다 나은 결론을 내어놓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침몰하기 직전의 배 위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존엄한 인간이라면 그 역시 존엄한 인간일 누군가가 난민이 되어 죽음의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내겐 침대에 누워 단잠 자며 기분 좋은 꿈을 꾸는 이곳이 누군가에겐 죽음의 바다임을 나는 안다. 저 앞에 난민이 있을 수 있다고,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 한다고, 그래서 가라앉기 직전의 배를 본다면 우리가 구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모든 배 위에 적어도 한 명 쯤은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답이다.


2018. 6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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