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날이 한참 지난 달력을 찢다 깜짝 놀랐다. 남은 종이가 너무 얇아서다. 큰일이다. 내 더딘 재주는 이룬 게 없는데 시간의 걸음은 거칠 게 없다. 쳇바퀴 도는 배 위 삶은 세월조차 잊게 한다. 무심한 난 오늘이 오늘인 줄도 몰랐다. 하선일이 성큼 다가오니 고개 드는 후회를 가눌 길 없다. 부지런히 살았다 생각했는데 게으를 수 있을 만큼 게을렀구나.
노트를 들춰보아도 건질 건 얼마 없다. 술에 취에 끼적인 글자는 알아보기조차 힘겹다. 돌아보면 글을 쓴 날보다 쓰지 않고 잠든 날이 많다. 술에 취해, 노동에 취해, 잠에 취해, 끝도 없는 변명들... 두렵다. 이대로라면 돌아갈 날이 멀다. 일 년, 이 년, 어쩌면 기약 없는 세월을, 유배지에서.
열 시간 노동을 하여도 열 한 시간 째 쓰지 않으면 헛일이다. 목표를 잊어선 안 된다. 좋은 항해사가 되는 건 과정일 뿐. 낮동안 무뎌지고 흐려지는 감각을 밤마다 부여잡아 갈고 닦는다.
못된 뱃놈들에게 비웃음사던 보들레르도 끝까지 예민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선원들에 붙잡혀 조롱받으며, 크고 하얀 날개를 질질 끌며, 불구자 흉내를 내며, 그렇게 온종일 갑판 위를 뒤뚱거리던 알바트로스. 추락한 창공의 거조에 스스로를 비유하면서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자를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던 시인. 그의 자부심은, 마침내 이뤄진 비상은, 얼마만큼 눈부셨는지!
그럼에 기억할 건 오로지 이 뿐. 긴 노동이 끝나고 선실에 들어서면 날갯짓을 멈추지 말 것. 바다가 내다 봬는 책상에 앉아. 네 진정 알바트로스라면 날고야 말리니.
2018. 8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