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상

수에즈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밝았다

바다

by 김성호


아카바만을 빠져나와 수에즈에 들어서니 어느덧 해질녘이다. 수에즈 운하 앞 앵커리지에 앵커를 놓고 대기한다. 콘보이는 언제나 새벽 일찍 출발하므로 그때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다.

대기하는 시간 동안엔 운하를 통과하는데 필요한 수속절차가 진행된다. CIQ라 불리는 세관·이민·검역 담당자가 쉴새 없이 배를 오르내리고 수속업무를 담당하는 삼항사가 이들을 맞이한다.

이날 밤, CIQ가 끝나고 카날인스펙터만 오면 되는 상황이었다. 당직을 마친 삼항사는 카날인스펙터들에게 줄 서류뭉치를 건네고 잠을 청하러 갔다. 서류만 주면 내려갈텐데 혹시 자기가 필요하게 되면 방으로 전화를 달라는 말도 함께였다. 밤이 깊어지자 무전으로 카날인스펙터가 배에 접근했다는 연락이 왔다. 서류뭉치를 챙겨 5번데크로 내려갔다.

도착하니 십수명이 우르르 모여 있다. 서로 자기들 말로 떠드는데 알아들을 수 없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선두에 선 이에게 서류뭉치를 건네니 받을 생각을 않는다. 다짜고짜 “고 투 캡틴!”이라는데 바로 선장에게 데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잠깐 기다리라 하고는 당직사관인 이항사에게 A데크로 데려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아니, 물으려 했다. 그런데 이들이 갑자기 성을 내며 돌아 보트로 내려가는 것이다. 급히 한 명을 붙잡아 이유를 물으니 우리 배가 자기들을 거부했단다. 거부한 게 아니라 위에 보고할 동안 잠시 기다리란 거였다, 이제 올라가자 해도 통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나와 저를 5번데크에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부터, 붙잡아 두고는 다시 무전을 하고 한 것들이 자기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아니냔다. 그래도 그렇지 고작 삼 분도 못 되는 시간을 기다렸다고 제 일도 않고 내려간다는 건가, 언제 오는지 무전으로 수차례 불러도 묵묵부답이던 놈들이! 화가 치민다. 될 대로 되라 싶어 잡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보트는 떨어지고 이내 배와 멀어진다. 보트에 탄 이들은 제 어깨를 가리키며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인다. 선장이 5번데크로 나와 사과를 하면 다시 오르겠다는 것이다. 말 같지 않은 소리. 보트는 이내 배와 멀어진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일항사는 브릿지에 오자마자 방방뛴다. 외부인이 왔으면 바로 A데크로 올려야지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어떡하냐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상이 없다는 증서를 받지 못하면 배가 운하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전으로 카날인스펙터와 에이전트를 급히 불러보지만 듣는지 아닌지 묵묵부답이다.

사실 내 입장에선 급할 게 없다. 보트야 다시 올 게 뻔한 일이다. 카날인스펙터가 원하는 건 자존심도 뭣도 아니다. 수에즈 운하 입장에서도 특별한 결격사유 없이 상선의 통과를 막는 건 부담이 가는 일이다. 거기다 상대는 규모 있는 해운사가 아닌가. 문제가 불거지고 정식으로 항의라도 하면 저들이라고 책임을 물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원하는 건 빤하다. 저들은 선물이라 하고 우리는 접대품이라고 부르는 것, 사과를 받는다는 명목으로 평소보다 몇배는 되는 담배를 얻어갈 속셈이다. 일항사야 혹시나 발생할 사태에 마음을 졸이지만 나로선 될 대로 되어라 하는 기분이다. 내려가라 해서 내려갔고 그곳에서 주라 해서 준 것인데 도대체 내가 뭘 더할 수 있었단 말인가! 애써 잡는데도 무례하게 등지는 놈들에게 굽신 대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난 이곳에서 월급 받는 정식 사관도 아니다. 마음 졸이는 사관들이 안타깝고 은근히 내게 책임을 돌리는 말투가 거슬리긴 하지만, 어차피 올 놈들이다 하는 마음으로 속 편히 기다리기로 한다.

아니나 다를까 두 시간 쯤 흐르자 저 쪽에서 무전에 응답을 한다. 데리러 내려갔더니 한 놈이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한참 시비를 턴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쯤 갈겨버리고 싶지만 그저 웃을 밖에. 업무상 미소를 짓고 웰컴 온 보드다 올라가자 하고는 데리고 위로 향한다. 결국 이들은 담배 열여섯 보루를 챙겨 돌아간다. 그러고도 부족해 한참을 투덜댄다. 검사는 하는 둥 마는 둥, 고급차량 앞에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끝까지 웃으며 접대하고 내려 보내니 어느덧 출발할 시간이다. 수에즈에서의 하루가 이렇게 밝았다.


2018. 9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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