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알렉산드리아에서의 하루는 정신없이 지났다. 지중해 동부 연안을 대표하는 도시로 헬레니즘 시대부터 역사가 깊은 곳이니 꼭 한 번 상륙을 나가보고 싶었지만 화물작업이다 뭐다 나갈 틈이 없었다.
잦은 술자리에서 선장은 내게 자주 공수표를 던졌다. 그 가운데는 상륙에 대한 것도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원할 때는 언제고 나가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항사에게 나가도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것과 실제로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 상륙을 위해선 갑판부 책임자인 일항사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데, 실항사가 일항사에게 자기 당직을 빼먹고 상륙을 다녀와도 되느냐 묻기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선박직원이 아닌 실항사에게 자기 당직이란 말도 웃기는 것이지만, 거의 모든 사관이 실항사를 당연히 일을 해야 할 아랫사람으로 생각하는 상황에선 이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누구 하나 상륙을 나간다면 말이라도 붙여볼 텐데, 선원들은 쇼핑센터와 카지노가 들어선 도시 말고는 흥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나가겠다고 말했다간 가뜩이나 좋지 않은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하기 십상이니 묵묵히 일이나 할 밖에.
그래도 이집트는 이집트다. 스턴램프로만 내려가도 도시의 분위기가 그대로 풍겨난다. 배가 부두에 닿자마자 보따리 장사꾼들이 데크에 올라 난전을 펴기 때문이다. 이집트 고대 신들을 돌과 나무로 깎아놓은 조각부터 신기한 문양이 새겨진 접시와 자석, 이집트 수공업자들이 직접 손으로 짰다고 주장하는 파피루스, 정품인지 의심되는 조악한 전자기기와 가죽제품 따위가 돗자리 위에 좌르륵 놓여 있다. 장사꾼들에게 다가가 가격을 물으면 돌아오는 말은 어김없이 “What is your price?”, 답하면 이집트 쇼핑의 꽃이라는 흥정이 시작된다.
이집트에서의 흥정이란 꽤나 재미있는 일이다. 누구는 150불을 주고 산 것을 다른 누구는 30불을 주고 사오고, 그들 모두가 진짜 가격을 알지 못한다. 내 필요와 물건의 가치를 짐작해 속으로 가격을 매기고, 그보다 한참 적은 값을 내밀고, 다시 살 듯 안 살 듯 필요한 듯 필요하지 않은 듯 밀고 당기는 과정이 물건 자체보다도 큰 기쁨을 준다. 불현듯 수없이 물건을 사면서도 스스로 물건에 값을 매긴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소비는 언제나 남이 붙인 가격표에서 시작됐구나 싶다.
장사꾼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다보니 긴장이 풀린 모양이다. 악명 높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휴대폰을 꺼내 바깥 풍경을 찍는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인데 화물작업 동안 배에 타고 있던 현지 경찰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그제서야 일이 났구나 싶지만 찍은 사진을 지울 시간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칙적으로 항구에서 촬영은 허용되지 않는다. 항만이 국가중요시설이기 때문이다. 보안상 통제가 필요한 시설물을 촬영하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문제 삼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이집트 같은 후진국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다가온 경찰이 휴대폰을 내놓으라고 호통을 친다. 경찰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상인들이 죄다 눈을 내리깔고 흩어진다.
휴대폰을 여니 꼼짝없이 찍은 사진이 나온다. 항만 안쪽은 기껏해야 담장 안 아스팔트 조금 나온 게 전부지만 나온 건 나온 거다. 한 몫 챙길 건수를 잡은 경찰이 물러설 리 만무하다. 경찰은 다짜고짜 선장을 데려오라고 소리부터 질러댄다. 그렇다고 어디 선장을 불러올 수가 있나. 이런 문제로 선장을 호출했다가는 남은 선상생활이 어디까지 꼬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세게 나가기로 작정하고 두 눈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다. 풍경사진 한 장 찍은 걸 가지고 무슨 짓거리냐, 너희나라 법부터 가져와라, 불법인지 확인부터 해보자고 버티니 권총에 손을 갖다 대고 위협이다. 너랑 이야기는 필요 없고 선장이든 일항사든 책임자를 불러오라는데, 못 알아들은 척 대리점 직원을 호출한다.
문제는 대리점 직원이 내려와서야 해결됐다. 저들말로 한참을 이야기한 경찰이 못이긴 척 휴대폰을 내준다. 천만다행이다. 그제야 무슨 이유든 들이대 옭아맸다면 꼼짝없이 당했겠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댄다. 다시금 내 나라를 떠나 있다는 실감이 든다. 큰 교훈을 얻었다.
고맙다, 이집트. 잊지 않겠다.
2018. 9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