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상

잘 써야 한다

단상

by 김성호

한때는 충분히 훌륭한 평론을 써내기만 한다면 마땅한 결과가 따를 거라고 믿었다.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땐 내 통찰과 해석, 글이 부족한 것이라고 되뇌었다. 가끔, 실은 그보다 자주, 이름난 평론가들이 초점을 잡지 못한 채 뻘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상하긴 했으나, 좋은 평론과 그렇지 않은 평론이 마침내는 제 자리를 찾아가리라 믿었다. 이집트에서 자란 모세가 제 주인을 섬기듯이, 그렇게.


그러나 이제는 믿지 않는다. 좋은 것이 좋은 자리로 간다는 건 환상일 뿐이다. 모두가 탐낼 만한 공간을 하나마나한 소리로 도배하거나 귀한 시간을 횡설수설로 채워도 알아채는 이가 없다. 값진 것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녀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단 건 슬픈 일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안 살 것 아니라면 잘 살아야 하고, 안 쓸 것 아니면 잘 써야 하는 것이다. 수확에 대한 기대 없이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승리에 대한 기대 없이 전장에 나서는 장수의 마음으로, 슬픔을 견디며 선을 다하여 오늘을 산다.



2019. 7

김성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찌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