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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Nov 13. 2022

가을이 끝나기 전, 시집 한권 읽고 싶다면

오마이뉴스 게재, <시의 미소>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28] '시의 미소'


시에도 입문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 입문서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되어줄 책이다. 현직 신문기자이자 등단시인인 허연이 세계의 유명 시인의 작품 한 편씩을 골라 엮은 <시의 미소>는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시세계로 들어서도록 이끌어준다.


책은 민음사가 1972년부터 이어온 '세계시인선' 개정판을 새로 내며 그 일환으로 준비한 작업으로 세계시인선에 포함된 시인 가운데 스무 명의 시가 한 편씩 포함됐다. 허연 시인이 세계시인선 수록 작가의 작품 가운데 스무 편을 추렸으니 일종의 민음사 세계시인선 올스타 작품집 정도로 생각해도 되겠다.

             

▲ 시의 미소 책 표지ⓒ 민음사


포함된 작가는 그리스․로마시대 시인인 사포와 호라티우스부터 헤르만 헤세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T.S 엘리엇 같은 세계적 문호, 에즈라 파운드와 아르튀르 랭보, 샤를 보들레르 등의 천재적 이름들이 망라된다.


동양 시인으로는 김소월과 김수영, 윤동주, 일본 하이쿠의 대표자 마쓰오 바쇼가 이름을 올렸다. 시단에서의 빛나는 명성보다 일반 독자에겐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름, 그러니까 스테판 말라르메, 딜런 토머스의 시도 소개돼 독자를 찬란한 시세계로 이끈다.


<시의 미소>는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읽으며 성장한 허연 시인이 자신을 시의 세계로 이끌어준 거장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1966년생인 시인은 세계적 시인들의 시 한편과 함께 자신과 시의 인연, 실린 시로부터 떠올린 생각을 담담하게 적어냈다. 거장의 시와 허연 시인의 글이 짝을 이뤄 하나의 이야기를 빚는 형태로, 독자가 시와 작가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하게끔 돕는다.


허연 시인은 널리 알려진 시와 시인의 이미지를 넘어 알려져 마땅한 새로운 단면을 꺼내어 소개하는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 하이네와 헤밍웨이의 시를 소개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에 이어 붙인 하이네의 시는 평소 익숙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허연 시인은 하이네가 쓴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을 소개하며 그가 1800년대 초 독일정부에 치열하게 저항한 시인이었음을 공언한다. <세계의 명시> 류의 책에 흔히 등장해 윗 세대의 연애편지에도 종종 인용되곤 했던 하이네가 단순한 서정시인이 아니라 탁월한 사회파 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상당수 독자에게 새로운 지식일 게 분명하다.


영원히 빛날 소설에 비해 턱없이 주목받지 못한 헤밍웨이의 시를 소개한 부분도 마찬가지. 허연 시인은 헤밍웨이가 직접 참전한 스페인 내전에 관해 쓴 시 '돌격대'를 통해 간결하고 강건한 문체와 고결한 것과 평범한 것을 넘나드는 작가의 시각을 흥미롭게 펼쳐낸다.


시집으로는 꽤 비싼 12000원의 가격에 고작 스무 편의 시가 실렸다고 불평하는 독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안에 실린 시, 담긴 문장 가운데 어느 하나 정도는 읽는 이의 문학적 경계에 자리한 육중한 철문을 비집고서 새로운 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먼 바다 쉴 새 없이 오가는 큰 배 갑판 위에 선 내게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선원들은 자주 심심풀이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아득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럽게 뒤따르던 길동무를.

갑판 위에 내려놓은
창공의 왕자(王子)는 서툴고 창피스런 몸짓으로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의 어색하고 무기력함이여
한때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어떤 이는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다른 이는 절뚝거리며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 흉내를 내는구나!

시인도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 속의 왕자(王子)와 비슷하여라.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훌륭한 산문을 어쭙잖은 운문으로 바꾸지 말 것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을 것.
그리고 그들에게 진 빚을 시인하거나 예의를 갖출 것
아무런 장식을 쓰지 말거나 아니면 아주 훌륭한 장식을 쓸 것

-에즈라 파운드, '시의 언어' 중에서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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