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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Nov 17. 2022

깊고 진한 한시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오마이뉴스 게재,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129]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책 표지ⓒ 왕의서재


빠른 것들의 세상이다. 결코 빨라질 수 없는 것조차 빠름을 좇다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래 숙성한 뒤에야 제 맛을 내는 장이며 술 같은 것들도 집 앞 마트에서 5분이면 살 수 있으니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진짜가 아닌 비슷한 무엇일지라도 말이다.


천천히 읽어야 제 모습을 드러내는 문학도 천천히 읽히는 경우가 그리 많지는 않다. 문학의 영역이 갈수록 좁아지는 가운데, 그중에서도 오래 생각하고 음미해야 하는 시의 자리는 다른 문학보다도 훨씬 더 좁아져 있다. 하물며 우리가 아는 시보다 오래되었고, 더 느리며, 더 여백이 많은 한시는 어떻겠는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는 멀고 어려우며 심심하게만 느껴지는 한시를 가깝게 소개하는 책이다. 한시 깨나 읽었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나 유명한 작품들을 한문학을 오래 공부한 저자가 추려 소개했다. 단순히 작품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품에 담긴 뜻과 얽힌 이야기, 저자 자신의 경험을 버무려 독자가 작품에 쉽게 다가서도록 배려했다.


실린 작품은 중국과 한국 옛 선조들의 시로, 중국 작가로는 이백·왕유·주희 등이, 한국 작가로는 이규보·이색·박지원·황현 등 역사에 이름을 새긴 이들의 시가 실렸다. 이외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소개할 만한 작품을 재조명하는 꼭지가 적지 않아 나름대로 풍부한 한시집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은 크게 사랑·사회·역사·영물·자연·죽음·친구의 일곱 장으로 구분된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책은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 주목해서 작품과 독자 사이의 연결점을 탐색한다.


애달픈 사랑과 가족의 죽음, 벗과의 즐거운 한때, 기약 없는 헤어짐, 뜻을 펴지 못하고 세월만 흘려보내는 이의 답답함,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 등 오늘 이 세상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마음과 생각들이 멋스런 한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고려의 이규보는 연인에게 꽃과 자신을 가져다 대고 누가 더 고운지를 묻는 여인과 능청스럽게 꽃이 예쁘다며 답하는 사내, 그러자 토라져서는 오늘 밤은 꽃과 주무시라 답하는 여인의 대화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송나라 초기를 산 매요신은 흙이 다하도록 기와를 구워도 제 집 지붕에는 기와 하나 없는 이와, 손가락에 진흙 한 번 묻혀보지 않고도 휘황찬란한 기와집에 사는 사람을 절묘하게 비교한다.


대동법으로 유명한 조선의 재상 김육은 군자들은 고초를 겪고 소인들은 뜻을 이루는 옛 역사를 볼 때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역사를 보지 않으려 한다고 술회한다.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고 '매처학자'라 불린 송나라의 임포는 뭇 꽃들 져버린 산에 홀로 정취를 독차지한 매화를 놓고서 술 한 잔을 기울인다. 조선의 문인 차천로는 중국 후한시대를 산 채옹의 일화를 끌어와서는 아궁이에서 막 불타려던 오동나무가 거문고로 거듭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신라의 최치원은 어지러운 세상 속 뜻을 펴지 못한 제 신세를 장맛비 맞고 향기가 다한 접시꽃에 비유하며 한탄한다. 다섯살 난 딸아이를 잃어버리고 꿈에서 그 형체를 본 아비 최립은 꾸역꾸역 시를 지어가며 슬픔을 추스른다. 당나라 우무릉은 '꽃 피면 비바람 잦고 인생엔 이별이 많다'는 명구절로 귀한 대접을 한사코 사양하는 벗에게 제 마음을 전한다.


독자는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적게는 수백 년, 많게는 천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가로질러 시를 짓는 옛 사람과 마주한다. 그로부터 작자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오늘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귀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한시의 제일가는 멋이며 동시에 초심자가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은 대개 한시가 지닌 함축성에서 비롯된다. 단 몇 자의 글자 안에 깊은 뜻과 뿌리 깊은 옛 이야기가 녹아 있어,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야 한시의 맛과 멋을 제대로 즐기기는커녕 그 뜻을 이해하기에도 벅찬 것이 현실이다. 이를 읽어낼 수 있는 이에겐 즐거움이겠으나 그렇지 못한 경우엔 무미건조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지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쉬운 대중서가 되는 걸 제일의 목적으로 삼은 듯 술술 읽히는 이 책을 통해서라면, 생애 첫 한시 즐기기의 짜릿함을 맛보는 일도 그리 어렵지는 않은 일일 테다.

 

12월, 한강물 얼어붙어 단단해지자
많고 많은 사람들 강 위로 나와서는
도끼 들고 쩡쩡 어지러이 깎아대니
쩌렁쩌렁 소리 저 아래 용궁까지 닿을 듯.
깎아낸 두꺼운 얼음 눈 덮인 산과 비슷하니
차갑게 쌓인 음기 사람에게 닥쳐온다.
아침마다 등에 지고 빙고로 들어가고
밤마다 망치와 끌 챙겨서 강 복판에 모인다.
낮 짧고 밤은 길건만 밤에도 쉬지 못하고
주고받는 노동요 소리만 모래톱에 울린다.
정강이가 드러난 짧은 옷, 발에는 짚신도 없는데
매서운 강바람에 손가락은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화려한 집에선 유월이라 뜨겁고 찌는 날에
미인의 흰 손에 맑은 얼음 전해주고
귀한 칼로 치고 부숴 온 좌석에 나눠주니
대낮 허공 속엔 흰 싸락눈 흩날린다.
집안 가득 채워 앉아 더운 줄 모르고 즐기는 이들
얼음 깨는 이 괴로움 그 누가 말하겠나.
그대 보지 못했는가. 길가에 더위 먹어 죽은 백성들
대부분 이 강에서 얼음 깨던 사람들이었다는 걸.

季冬江漢氷始壯 계동강한빙시장
千人萬人出江上 천인만인출강상
丁丁斧斤亂相鑿 정정부근난상착
隱隱下侵馮夷國 은은하침풍이국
斲出層氷似雪山 착출층빙사설산
積陰凜凜逼人寒 적음늠늠핍인한
朝朝背負入凌陰 조조배부입능음
夜夜椎鑿集江心 야야추착집강심
晝短夜長夜未休 주단야장야미휴 
勞歌相應在中洲 노가상응재중주   
短衣至骭足無屝 단의지한족무비   
江上嚴風欲墮指 강상엄풍욕타지
高堂六月盛炎蒸 고당육월성염증
美人素手傳淸氷 미인소수전청빙   
鸞刀擊碎四座徧 난도격쇄사좌편   
空裏白日流素霰 공리백일류소산   
滿堂歡樂不知暑 만당환락부지서 
誰言鑿氷此勞苦 수언착빙차로고   
君不見道傍暍死民 군불견도방갈사민
多是江中鑿氷人 다시강중착빙인   

김창협 1651-1708, 鑿氷行 착빙행, 얼음 깨는 노래, <농암집> 권 1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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