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계약

단상

by 김성호

집에 들어오기 무섭게 빗줄기가 후두두둑 떨어진다. 기상청 예보엔 강수확률 20%. 예보관은 재수 없는 날이지만, 젖은 생쥐꼴 면한 나는 운수 좋은 날이다.


오늘로 퇴사한 지 28일째다. 소식을 알린다고 알렸지만 충분히 멀리 닿지 못했던가 보다. 어찌어찌 구했을 내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억울한 제 사연을 풀어놓는 이가 많다. 친절하지 못한 나는 대부분 매몰찬데, 어쩌다 한둘쯤은 마음이 아려 가만히 듣게 되고는 한다. 고작 몇년 기자로 일한 경험에 기대어 가당찮은 조언도 해보지만, 수화기 너머 한 서린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어느새 말은 멎고 침묵만이 자리한다.


처마 밑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본다. 우산 없는 여고생이 헤매듯 달려간다. 물을 끓여 차를 우린다. 미지근한 물을 붓고 큼직한 얼음을 띄운다. 빗줄기 굵어지는 사이로 찻잔 안의 얼음만 잘그락잘그락.


퇴사 뒤 고작 28일이 흘렀다. 손가락으로 기사만 두들기다 뒤늦게 문학을 구하려니 글이 익질 않는다. 그간 짤막한 소설과 시와 수필과 평론 몇편쯤 끄적였는데 건질 것은 반의 반도 되질 못한다. 반 년의 시간이 벌써부터 민망하다.


그러나 잘 될 것이다. 나는 늘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비가 쏟아질 땐 피할 곳이 있었고 피하지 못할 때엔 젖기 좋은 날이었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고 이뤄질 일은 이뤄지게 마련이다. 운을 따라 마음도 움직이니 부담도 후회도 따르지 않는다.


책 출간 계약을 맺었다. 반짝이는 출판사 포르체에서 산문집 제안을 받았다. 안 그래도 책을 써야겠다 싶었다. 귀하고 감사한 기회, 충실한 원고로 보답하기로.


지난 시간을 글로 엮기로 한다. 전해야 할 것을 마땅한 방식으로.


퍼붓던 비가 어느새 멈추었다. 숨막히는 더움도 쉬어가는 오늘이다. 축구를 보고 산책을 나가야지. 나는 언제나 운이 따른다.



2021. 7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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