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동안 MBTI 물어보는 사람을 다섯이나 만났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중학교 시절 얘기다. 담임이 존경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라고 시켰다. 아이들은 돌아가며 위인전에서 읽은 이름들을 나열했다. 링컨이며 워싱턴이며 김구며 유관순이며 이순신이며 장영실이며 뭐 그런 이름들이 나왔다. 반 돌아가는 꼬라지는 웅녀가 마늘먹던 시절보다 후진데 불리우는 이름들은 너무나 위대하여 듣기만 해도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줄곧 한심한 책만 읽은 게 자랑인 띨빡들과 취향이라고는 신화가 멋있냐 지오디가 멋있냐밖에 없는 계집애들, 생각은 청바지입을지 면바지입을지 고민할 때나 하는 애새끼들이 위인전 뒤꽁무니에 붙은 감상평을 베끼다시피 읊어가는 시간이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수학은 암기가 전부라고 주장하는 노처녀 수학교사는 고작 지금 내 나이 밖에 안 됐으면서도 세상 모든 노처녀의 한을 홀로 품은 듯 못돼 처먹었었다. 나와 그년을 함께 아는 이들은 내가 그년 집을 찾아가 두들겨패도 나를 응원할 것이 분명한데, 그건 그년이 여기 적지 못할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그중 상당수가 특정한 남자애들을 향했으며 내가 대표적인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두가 그년의 열등감에서 비롯됐단 걸 알지만 그를 자극하길 멈추지 않았으니 내 탓도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다.
무튼 그 시간은 모든 것을 구분짓고 차등하길 좋아하는 그년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수업이었다. 너는 어느 동네에 살고 부모는 뭘로 돈을 벌며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성적은 어떠하고 품행은 어떠하며 집에 시시콜콜 학교얘기를 하는 녀석인지 따위가 그년이 파악하고 있는 기본 정보였다. 모르긴 해도 그년이 능력만 됐더라면 아이큐나 혈액형이나 별자리나 사주팔자까지 기록해서 학생들을 구분짓고 달리 취급했을 거다. 그날도 그년은 제가 좀 아는 위인이 언급되면 화색을 띄며 '역시' 하고 감탄했는데 역시는 무슨 역시란 말인가. 위인이 왜 위인인지도 모르는 놈들이 엉망으로 출판된 삼류 위인전 뒤쪽 독후감요약본을 딸딸외워 읊는 것도 한심한 노릇인데 마리 퀴리엔 '역시' 베이브 루스엔 '쯧쯧' 소리를 내는 그년의 몰상식까지 견뎌야 하다니!
내 차례가 되어 나는 마크 트웨인을 이야기했다. 가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으며 쏟아지는 모든 의심을 홀로 격파해낸 단단한 인간, 가장 보잘 것 없을 때조차 자부심 넘쳤던 반짝이는 지성의 소유자가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으므로. 그년은 특유의 비웃음으로 네가 그가 쓴 소설을 읽어는 보았냐고 물었는데 그년이 애들 동화책 취급하며 압수해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그의 대표작이란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증명조차 외우게 하는 한심한 수학교사가 트웨인을 읽었을 리 없다. 트웨인의 세계에서 그년 같은 인간은 잘 해야 추방이요, 재수 없으면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년이 트웨인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 묻고 당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을 때 나를 돌아보며 지었던 표정은 또 한참을 깔보는 것이었다. 다만 내가 최대한 비슷한 표정을 지어 그년을 분개하게 했다는 건 아마도 죽을 때까지 통쾌할 대목이다. 너 같은 게 무슨 대학을 가느냐고, 글은 아무나 쓰느냐고 꼬집듯이 말하던 그년에게 내가 대학에도 갔고 글도 쓰며 산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람. 내 안의 깊은 우물과 사다리와 나무 몇그루가 그년 덕에 깊어지고 길어지고 굵어졌단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마크 트웨인을 애정한다. 그의 삶에도 그년 같은 방해자가 여럿 있었단 걸 안다. 그는 그 모두를 아주 우습단 듯 지나쳤고, 가끔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그들 모두가 흉내도 못낼 성취를 이뤄냈다. 내가 그의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나와 동류라고 확신했다. 눈 앞의 사람도 이해할 마음이 없으면서 온 세상을 나누고 싸잡길 즐겨하는 인간들을 경멸하면서도, 그들이 물고 빠는 MBTI가 나름 근거 있는 분류법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건 오직 이 때문이다.
2022. 7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