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을 가르며 쓰인 역사

사람 찾아 떠나는 여행

by 김성호

용산엔 퀴논길이 있다고 했다. 퀴논은 베트남의 유서 깊은 도시 뀌년이다.


뀌년엔 삶과 죽음을 가르며 쓰인 역사가 있다. 나는 그 역사를 만나러 뀌년을 찾았다. 19세기 떠이썬의 명장 쩐 꽝 디에우와 응우옌 왕조의 기둥 보 따인이 제 세력의 운명을 걸고 맞선 곳도 뀌년이었다. 나는 200년 전 이곳에서 자결한 보 따인과 그의 부장 응오 퉁 차우를, 또 그들이 살린 수많은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것이다.


월남파병군 주력 맹호부대 주둔지도 뀌년이었다. 그들이 이 땅에 새긴 상처, 한국군 증오비가 섰다는 학살지에도 가볼 것이다. 군수와 차관지원, 주한미군 지속주둔, 외화벌이, 군의 실전경험 확보 같은 분명한 성과를 한국은 부당한 전쟁에 참여하는 대가로 얻어냈다. 그러면서도 실제 피흘린 아군 장병에 대한 처우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국군 포로를 나몰라라해 북으로 보내지게 했고 무차별적으로 살포된 고엽제 피해에도 항의 한 마디 안 했다. 하물며 적국 민간인 피해를 돌아보았겠는가.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미 해병대의 본거지는 다낭이었다. 긴 해안선을 따라 상륙과 진출이 자유롭고 군이 주둔할 물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북진해야 하는 미군에게 다낭은 해안으로 쉽게 들고날 수 있는 중부의 요충지였다. 같은 이유로 국군 해병대 청룡부대의 주둔지 역시 다낭으로 낙점됐다.


다낭으로부터 남쪽으로 300km쯤 내려오면 뀌년이 있다. 채명신 장군이 이끄는 맹호부대가 상륙한 곳이 이곳이었다. 미군은 맹호부대에게 1200평방km에 이르는 전술책임지역을 인계하고 빠졌다. 뀌년은 미군에게도 계륵 같은 곳이었는데 다낭을 턱밑에서 지원하는 요충지지만 베트콩이 가까이 주둔하며 끝도 없이 게릴라전을 펼쳐오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치러낸 정예이며 제발로 참전을 선택한 한국군에게 맡기기엔 이 만한 지역이 또 없을 터였다.


맹호부대는 뀌년을 중심으로 많은 작전을 수행했다. 맹호5호 작전과 띤빈전투 같은 성과부터 안케패스 전투 같은 참담한 조작극에 이르기까지 월남파병군의 주요 전투 상당수가 뀌년 일대에서 치른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맹호부대는 정규군인 북베트남군만이 아니라 게릴라인 베트콩과도 자주 맞섰다. 자연히 병사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그 무렵 이 일대에선 수많은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고됐다. 생존자들은 가해자로 맹호부대를 지목했다. 불과 반 세기 전 일이지만 마치 생존자가 모두 죽어나가기를 기다리는 듯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가보려 한다 하니 누구는 역사연구의 방법론도 모르고 접근하는 멍청이들이 감정팔이 사기를 치는 곳이 아니냐는 말을 했다. 사건을 국내에 소개한 언론들, 그들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수준, 방송에 출연해 학살을 소개하는 이들의 면면까지 살피다보면 그런 일이 아예 없으리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중 적지 않은 수는 실제로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뀌년을 살아가는 이들은 고집세다고 들었다. 도시화된 사이공과 하노이로 떠나지 않고 낙후된 도시를 사는 이들에게선 제 것을 지키려는 완고한 기질이 엿보인다고 했다. 나는 뀌년에서 목적지를 찾지 못해 날을 허비했으나 덕분에 적잖은 이들과 만나 수십잔쯤 술잔을 나누게 되었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없으면 말 한 마디 통하지 않을 이들과 잔뜩 취하여 말이 필요 없을 때까지 즐거워했다. 검게 탄 얼굴과 완고한 팔뚝, 빈약한 주량을 가진 사내들이 보 따인과 지나간 전쟁을 찾아온 이와 사귀고자 하였다. 나는 여행자의 관대함으로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다음날 나의 바이크엔 기름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내가 한참 더 헤맬 것을 알았다는 듯이.



2022. 9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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