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새벽 네 시
차 없는 텅 빈 도로 축축하게 젖고
잠 잊은 여행자만 북에서 서로 동에서 남으로 헤매는 시간
새 도시와 처음 만나면 한참을 걷고는 해
그래야만 만날 수 있는 게 있고
그 만남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나는 옛 사람처럼 미신을 믿지
사람과 건물과 나무와 거리가
물소리와 차소리와 온갖 동물 서성이는 소리가
죄다 하노이의 깊은 물 속으로 후루룩 떨어지는 시간이 오면
대야에 물 받아 세제를 풀고 그릇들 쏟아 부어 흔들어 씻는 그런 여자를 지나게 되면
호텔 앞에 의자 펼쳐 꾸벅꾸벅 고갤 떨구는 저 피곤한 제복 사내에게 아내가 있을까를 가만히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전등 불빛 새나오는 골목 안에서 갓 스물쯤 된 녀석들이 잔뜩 취해서 나를 올려다보면
나는 그들 곁에 앉아 두유노 박항서 두유노 비티에스 두유노 봉준호 두유노 김성호 아 너는 나만 모르는구나 나도 너를 몰라 이새끼야 그렇게 떠들다가 하노이는 술도 인심도 남쪽보단 못하다고 침뱉고 욕하면서 일어나고 마는 거야
대가리 큰 삐끼놈은 웃통깐 여자 사진 보여주며 붐붐 붐붐 붐붐을 외쳐대고
나는 한국에 죽여주는 여자를 두고 왔다고 꽤나 오래 묵은 사기를 쳐
우린 서로 한참을 웃다가는 두유노 박항서 두유노 비티에스 두유노 손흥민 그러다가 아이노 꽁프엉 아이노 보응우옌쟙 아이노 투반꽝 하고 노는 거지
길바닥 붐붐쟁이도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데 나는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반성이나 좀 해볼라다가
반성도 도무지 성격에 맞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야 마는 거야
리어카 가득 꽃을 실어오는 갓 쓴 여자는 보도블록 위에 과일들 늘어놓는 중늙은 여자와 인사를 하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엄마였고 이제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할머니일 그녀들은 정말로 제 인생에 떳떳한 것일까 나는 문득 그것이 궁금해져
어째서 나는 떳떳하지 못한 걸까
중요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나는 모두 갖고 있었는데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또 잃어가고 있는지를
서른까지 한참도 더 남은 젊은 여자가 조는 아이를 등에 업고 쌀국수를 내어온다
나는 그걸 후후 불어 삼키면서 나보다 몇살이나 더 어린 그이의 남편과 번역기에 대고서 이런저런 얘기를 해
한국에는 아름다운 여자가 많다는데 왜 너는 여적 혼자냐고
그건 네가 한국 드라마를 너무 봐서라고
너네 나라는 늙은 처녀총각이 많다더라고
늙고도 늙은 줄 모르는 애들이 수두룩빽빽이라고
네 얘기냐고
내 얘기라고
한국사람은 많이 먹던데 더 먹을거냐고
한 그릇 더 팔아서 가게 또 차리려냐고
아니 그냥 줄거라고
그럼 사양 안 한다고
뭐 그러고 놀다가는 또 어디든 가는 거지
여기는 하노이
물에 젖은 용의 도시
구름 뚫고 올라가다 연못 바닥 내려꽂힌 어리고 불쌍한 용의 자리
천년의 도읍지와 목 잘린 왕족들과 무너진 황성과 얼기설기 선 체제와 억척같이 살아가는 사람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멀리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경적소리
여기는 하노이
숨져가는 나의 새벽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