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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감정도 능력

단상

by 김성호

전엔 형이 소시오패스 아니면 개새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형을 알고 지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고 말한 자식이 있다. 비싼 술을 두꺼비 따듯이 따주는 그가 좋아서 나는 하극상 비스무리한 말도 못들은 척 넘겨 버린다. 결국엔 술 사주는 놈이 고운 놈이고, 내가 이 자식한테 해왔고 앞으로도 할 일들을 생각하면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닌 것이다. 적어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 정 많고 의미부여하기 좋아하는 녀석이 기대하는 마음을 보여주지는 못할 테니까.


대저 감정이란 것도 능력이다. 그리하여 누구에겐 줄줄 흘러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이에겐 수십 미터를 파낸 뒤에야 겨우 한 줌 길어내는 게 고작일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은 다른 감정을 끌어내는 마중물이기도 하므로 빈익빈 부익부, 갖춘 자가 더 많이 누릴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고.


불행히도 발달이 더뎠던 나는 감정 또한 충실히 갖추지를 못하였다. 가까운 이들 몇을 질병이며 불의의 사고로 잃어가는 동안에도 인간이란 나서 한 번은 죽는 것이니 조금 일찍 보낸다 해서 슬플 건 또 무엇이냐 대단찮게 여겼을 뿐이다. 누군가는 비인간적이라며 손가락질도 하였으나 나는 내가 평범한 놈들보다 몇배쯤은 단단하다 뿌듯해 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 시절 나란 인간은 척박하고 황량한 대지 위에 움막 하나 짓고 사는 괴팍한 노인네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이든 앞이 있으면 뒤도 있다. 한겨울 북녘 언덕엔 잡초가 자라지 못하듯이, 슬픔이며 우울이며 절망 같은 온갖 나약함의 징표들도 그 시절 내게는 둥지를 틀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감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어서 도달한 자극 뒤엔 찌꺼기가 남고 찌꺼기들은 어떻게든 배출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덜떨어진 녀석들처럼 내게도 그 창구는 화였다고 하겠다.


그 시절의 화는 대상이 있을 때면 분노가 되어 쏟아졌고 없을 때도 곧 터질 듯이 넘실거렸다. 자연히 나를 오래 알고 지낸 녀석들은 나를 그리 선한 사람으로 기억할 순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단점에도 미덕은 있다. 그중에서도 매 감정의 첫 순간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한단 건 무척이나 이로운 일이라 하겠다. 이를테면 어느 죽은 철학자의 글을 읽고서 내 주변엔 누구도 마주 앉아 대화할 만한 녀석이 없다 낙담한 시절이 있었다. 그 때의 실망은 얼마나 깊었던가. 그러다가 보는 것이며 떠드는 것이며 무엇이든 남다르게 바꿔내는 이를 만났을 때 아 이 세상에는 마주앉아 온갖 것을 떠들 수 있는 이가 분명히 있구나, 나는 몹시 감격하였던 것이다. 환희며 반가움이며 낙담이며 실망들과 허무함과 공허가 뒤늦게 스쳐갔던 오후들이 그 시절엔 얼마나 잦았던가를 기억한다. 그리하여 나는 귀한 이들과 깊이 사귀었고 쉽사리 깨지지 않는 관계를 이룩하였다.


이따금 방 안 모든 물건이 선실 벽짝에서 뒹굴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그 길고 위태로운 시간을 견뎌 맞이한 아침, 선창을 열고 푸르다 못해 시린 바다가 침묵하던 순간을 보았을 때 나는 평온이란 무언지를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또 많은 시간이 흘러 결코 잃어선 안 되는 것을 잃었음을, 절대 보내선 안 되는 것을 보냈음을, 남겨선 안 되는 것을 남겼음을 깨달은 날이 있었다. 그 순간부터 이어진 상실과 슬픔과 외로움과 서글픔과 우울함 따위가 얼마나 짙었는지, 나는 술을 퍼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겠다 덜컥 겁을 먹고만 것이다.


때로는 누구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끔은 믿었던 이에게 실망도 한다. 마음 없는 사람에게 구애를 받거나 의도치 않게 타인을 상처입히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마다 다가오는 감정 또한 선명하여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삶이 지루하지 않음에 진실한 웃음을 흘리고는 한다. 만일 술이 없었다면 그 모든 순간들은 또 얼마나 무미건조했을지를 나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잔뜩 취하여 흔들리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 사람을 여유롭게 한단 것도 다행한 일이다. 맨 정신으론 살고 싶지 않던 날도 술을 좀 마시다 보면 평안이며 온유함과 닿게 되는 것이니, 나는 막힌 감정 여럿과 술을 통해 만나는 날이 잦았다고 하겠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굳이 곁에서 술잔을 기울여 준 이가 끊이지 않은 건 고마운 일이다. 술을 마시고 쓰는 글이 자주 감사에 닿는단 것도 내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니 수많은 잔소리에도 나는 조금은 더 마셔봐야 쓰것다.



2022. 12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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