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프라고 했다. 핑거 프린세스, 단톡방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남들이 해주는 것만 쏙쏙 빼먹는 이를 요즘엔 핑프라고 부른단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버렸다. 내가 바로 핑프란 것을.
늘 그랬다. 음식점을 고르고 숙소를 잡고 여행이며 약속일정을 짜는 건 죄다 다른 녀석들 몫이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그래 아니면 그건 좀 아니야 다시 구해봐 정도. 그리고는 조용히 약속장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나마도 야 픽업 좀 해가라 할 때가 적지 않으니, 적다 보니 정말 까탈스런 공주님이 따로 없다 싶다. 아이고야 이제껏 나를 사귀어준 녀석들에게 감사를!
물론 인생이란 기브 앤 테이크, 주고 받는 균형의 미덕이 있는 것이다. 당연히 나라고 받기만 했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으로 대뇌 피질의 주름까지 까뒤집어 샅샅이 뒤져보다보니 남는 건 민망함이요 드는 건 미안함이라 결국 나는 평소처럼 나와 친구를 먹었으면 그쯤은 감당해야 한다고 우겨보기로 한다. 공주가 빨래하고 무사가 통치하며 세탁부가 싸움을 해서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말이다.
무튼 깨달음을 얻은 나는 평소 빚을 좀 졌다 싶은 녀석들을 추려 따로 전화를 돌린다. 얌마 고맙다 니가 약속장소 고르느라 고생 좀 했다 하고, 자식 고맙다 니가 연락 돌리느라 수고했다 하며, 새꺄 고맙다 니가 애들 챙기느라 욕좀봤다 하니, 하나 같이 야 너 왜 그러느냐 요즘에 많이 힘드느냐 성격이 변해도 요 몇년은 너무 다이나믹한 거 아니냐 뭐 그렇게들 귀찮게 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전에도 지금처럼 세련되고 쌈빡하며 유쾌했던 것만 같아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연락을 기점으로 단톡방들은 새해 약속을 잡으려 분주히 움직인다. 가만히 보다보니 알게 모르게 역할이 나뉘어 있는 것이어서 누구는 여행이다 캠핑이다 낚시다 익스트림 스포츠다 등산이다 운동이다 게임이다 술이다 뭐 그렇고 그런 테마를 제안하고 또 누구는 고기를 구울까 생선을 먹을까 어느 동네에 어느 맛집이 일품이다 먹거리를 제시하기 바쁘며 또 다른 누구는 그럼 누구누구한테 연락해볼까 누구는 지금 바쁘고 또 누구는 집안일로 정신이 없을텐데 뭐 그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핑프인 나는 이번에도 공주짓을 하려다가 새해에는 좀 달라진 모습을 보이려고 넌지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는데 내가 보기에도 내가 꺼낸 제안들이 영 형편없는 것이어서 녀석들은 마지못해 으...으응...으응...그런데 그건 쫌 그렇지 않을까 뭐 그딴 반응 일색인 것이다. 좀 심한 놈은 김성호 이색기 요즘 감떨어졌네 어쩌고 저쩌고 해대는데 기실 나는 이쪽으론 감이 있었던 적이 없다.
그 순간 깨닫는다. 군군신신부부자자, 오랜 경전의 가르침대로 핑프는 핑프답게 행동해야만 질서가 세워진단 것을. 단두대에서 목이 달아난 저 먼 나라 왕비꼴이 되지 않으려면 핑프에게도 수면 아래의 처절하고 영리한 발차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군림하는 듯 보이는 사파리의 사자조차 굶어죽기 직전에야 사냥에 성공하는 것이니 질서란 건 겉으로 훑어보듯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다.
2023. 1
김성호